‘아싸’를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고등교육까지의 12년간, 나는 자타가 공인하는 아웃사이더로 살아 왔다. 일단 집에 들어가면 세상 모든 것과 단절됐다. 웬만하면 그냥 디비 누워서 천장만 멍하게 보거나, 학원에 가서 학원 친구들이랑 놀곤 했다. 영화나 만화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친구들을 불러내어 예쁜 옷 빼 입고 놀러 다니며 추억을 쌓는 것과는 분명 거리가 있었다.?휴대폰이 없던 시절이나, 휴대폰이 있던 시절이나 별반 마찬가지였다.
내 태생적인 아싸 기질에 대한 설명은 좀 길어질 수 있으니 여기서 관두기로 하겠다. 아무튼 그래서 나는 이 아싸 생활의 외로움에 드디어 지쳐 버렸고, 대학 입학과 함께 모종의 반전을 꿈꾸게 되었다. 흔히들 말하는 ‘대학 가서 성격 좀 고쳐보려고 하는’ 케이스. 그게 바로 나였다. 외모부터 바꾸기로 했다.?평생 안 끼던 렌즈도 껴 보고, “매직”도 해 보고, 나름 멀쩡한 옷을 골라 입었다.
역시 사람은 첫인상이 중요한 것이었다.?강의실에 널리고 널린 스타일 취급은 받았지만, 일단 혹평은 받지 않았다. 내 인생 첫 인사이더 데뷔는 나쁘지 않았고, 그때부터 나는 점점 용감하게 인사이더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이후 일어날 앞일은 까마득히 모른 채.
눈에 보이는 게 없던 시절
새내기 카톡방에서 신나게 떠들어 놓은 덕분에, 개강 당시 내 이름을 모르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어차피 아버지 회사에서 등록금도 나오겠다. 나에겐 거칠 것이 없었다. 밀려오는 술자리 빼지 않았고, 자주 필름이 끊겼다. 내가 알지도 못하는 흑역사가 쌓여 갔다.
그래도 뭐 그때까지는 괜찮았던 것 같다. 사람들은 그저 ‘아직 어리고 뭘 잘 몰라서 그렇지 정이 많은 애’ 정도로 취급해준 것 같다. 그토록 바라던 대학 생활의 로망이 내게도 왔다!?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나의 이런 바람과는 다르게, 학교 생활 조용히 하고 싶어하는 동기, 아니면 사람은 좋아하지만 술은 싫어하는 동기들이 존재했다. 그리고 나는 술자리 말고는 사람 사귀는 방법에 서툰 상황이었다. 그러니 나로서는 그들과 친해질 방법이 없었다. 또, 하도 술을 마시다 보니 결국 나중에는 마시던 사람들하고만 술을 마시게 됐고, 그로 인해 친분 범위가 상대적으로 좁아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동기들과는 다소 다른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던 것은. 그렇게 술을 마셔 대니 수업에 나갈 수 있을 리가 없었고, 나중에는 동기들끼리 이야기하고 있는 곳에 끼었을 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가 됐다. 그렇다고 교수들과의 관계가 원만했는가 하면 당연히 그도 아니었다. 수업에 나가지 않는 학생을 어느 교수가 좋아하겠는가? 1학년 1학기의 학고를 간신히 면했던 것이 불행 중의 다행이었다.
그때는 너무 어리고 멍청했다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2학기를 맞이했다. 방학 도중에도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하며 폐인 생활을 한 나는, 학기가 시작되면서 기다렸다는 듯이 술을 마셔댔다. 그리고 점점 현실에 눈을 뜨기 시작한 동기들은, 내가 가는 ‘술자리’를 피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나는? 동아리 영화 촬영이 바쁘다는 핑계로 여전히 학교 수업을 빠졌고, 정말 그 시간에 해야 하는 일들은 왕왕 놓쳐 가면서도 ‘난 학교 생활을 만끽하는 중이야’ 하고 자위했다. 그만큼 멍청했다. 그러다가 술자리를 빼는 동기들, 몇몇 학과 행사에 안 (또는 못) 나오는 동기들을 욕하기 시작했다. 학과에 대한 애정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그게 그 사람들 귀에 들어갔다.
그러다 '공개처형'이 찾아왔다. 동기 MT 일정으로 잠시 학번 총회가 잡혔었는데, 그 뒷자리에서 거의 목이 날아갔다.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린치를 당하니 정신질환이 찾아왔고, 나는 애써 그들을 무시하며 스스로 굴을 파기 시작했다. 예전처럼. 그나마 나를 챙겨주던 사람들에게까지 등을 지고, 나는 다시 혼자 굴을 파고 있었다.
내가 맡아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불운하게도, 1학년 시절 동아리 생활을 열심히 한 이유로 덜컥 동아리 회장을 맡아 버렸다. 사실 그때는 사소한 권력욕에 취해서 들뜬 기분이었고, 단순 회계 업무나 그런 일들은 나름 잘 처리했다. 동아리 지원금 몽땅 때려박아서 5천원 MT도 가 봤으니까.
문제는 사람이었다. 나는 수업을 나가지 않은 선배였고 , 당연히 학사일정이 정확히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사람이었고, 그렇기에 후배들에게 알려줄 수 있는 게 전무했다. 말 그대로?요란한 빈 수레 같은 회장이 되어 버렸다. 말로는 잘 챙겨준다, 오면 도움 될 거다 등등의 말로 꼬셔서 데려와 놓고?정작?줄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술자리를 굳이 끝까지 지켜서 진상이 되는 일이나, 때때로 꼰대 주폭이 되는 일이었다. 결과는 뻔했다.?동기들은 이미 그 전에 나를 두고 모조리 동아리 바깥으로 떠나갔고, 그나마 들어왔던 새내기들도 절반은 동아리를 나가버렸다.
돌이켜 보면, 누구보다 완벽하게 인사이더이고 싶었던 내가 동아리 하나를 망조로 몰아넣은 것이었다. 지금은 내 뒤의 사람들이 어찌어찌 잘 해서 그나마 인공 호흡기 정도는 달고 있는 것 같은데, 그마저도 내 덕이 아니라 그 사람들 덕이다. 내가 회장이 된 이후, 그나마 남아있던 나머지도 손에 꼽는 숫자를 빼고는 사실상 유령 회원이 되어 버렸으니까.
제적당하고 입대하고 전역하니 정신이 들었다
1학년 때 안 하던 공부를 2학년 때 할 수 있을 리 없고,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1-2, 2-1, 2-2 연속 학고 쓰리런을 때렸다. 그렇게 멋지게 학교에서 쫓겨나 놓고도 정신 못 차리고 학교를 기웃거리다가, 갈 때가 되어서 입대를 해 버렸다.?휴가 때 가끔 학과나 동아리를 기웃거리면, 따뜻하게 맞아주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내가 불편했다. 술만 마시면 쓰레기가 되는 버릇은 여전히 고치지 못했고, 작년 1년은 의식적으로 학교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학과 생활 마지막은 나 스스로도 좀 지쳐 버려서, 동아리 MT 같은 건 일부러 이상한 핑계를 대고 빠졌다.?다른 선택이 불가능했다.?개강 후 3일 동안 통학 생활을 해봤는데 정말 죽을 맛이더라. 대학 입학 후 4년간 그야말로 한 주가 멀다 하고 술을 퍼마시며 살았는데, 지금은 의지나 욕구와 상관 없이 그렇게 마실 수가 없다. 늙어서 그런 것도 있고, 두 시간 가까이 걸리는 통학이 너무 힘든 것도 있는 것 같다.?이런 생활을 버텼던 동기들이 참 대단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그렇다.
그나마 일상이 유지되는 걸 보면, 알콜중독은 아니었구나 싶어 다행이다.?차라리 다시 2012년으로 돌아간다면 자살을 택하거나 재수를 택하겠다. 하지만 현대 과학으로 시간여행은 불가능하니, 이젠 그저 아무도 모르게 쥐 죽은 듯이 학교생활을 마무리 하고 싶을 뿐이다. 학과장에게 빌고 빌어서 내 개인사는 수습을 했으니 그만이고, 눈에 띄지 않게 돌아다니면 남들 기분 나쁠 일도 없는 것 아닐까?
오늘은 우리 단과 대학 OT 출발일이다
얼마나 많은 후배들이 새내기 대학생이 된다는 설렘을 품에 안고 있을까를 생각하다가 문득 키보드를 잡았다. 이 단과대는 워낙 이상한 인간이 많이 들어오는 동네여서, 나 같은 놈 하나 더 들어오는 게 그리 신기한 일도 못 되고, 요즘 시대에 나 같은 인사이더 지망생이 또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혹시나 만약에 20대 초반이면서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신입생들이 있을까봐.
맞다. 노는 건 즐거운 일이다. 특히 초중고를 재미 없이 지낸 사람이라면, 대학에서는 어떻게든 ‘활발’하고 ‘잘 노는’ 인사이더로 변신하고 싶을 수 있다. 하지만 대학이란 절대 놀기 위한 장소가 아니기 때문에, 결국 모든 생활은 학업 위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니, 놀 때 놀더라도 무리가 된다 싶으면 적당히 그만둬도 된다. 그렇게 ‘아싸’가 되는 걸 혼자 부끄러워할 이유는 없다.
한때 인싸이더라고 생각했던 나는 지금, 과연 누가 읽어줄까 싶은 심정으로, 이렇게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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