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에서의 20시간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도 이태원의 민낯을 보았다.

누가 '소돔과 고모라'에서 오래 버티나 내기할까?

내 친구 “규(26, 휴학생)”는 멋진 새끼다. TV에 나오는 화성인들과 만나도 쿨하게 인사하며 경리단길을 같이 걸어다닐 것만 같다. 그런 규가 썰을 푼 적이 있었다.

지난 주말에 이태원에 갔더란다. '언니들'이 밤새도록 광란의 파티를 벌이는 클럽을 나와서, “너무 졸려서, 난 그냥 잠깐 자려고, 그 언덕 위에 사우나 있잖아요, 거길 갔는데…” 오전 5시쯤에 수면실을 가봤더니, “그… 성경의 소돔과 고모라같은 광경… (발그레) 거기… (수줍) 있더라…”는 것이다.

과연 이태원답다고 친구들이 쑤근거리던 와중에 나(26, 무직)는 믿을 수 없어서, 그리고 괜히 센 척하고 싶어서 면박을 줬다. “야! 거기도 사람 사는 덴데 무슨 소돔과 고모라냐? 설마 그 정도일라구?” 규도 나를 도발했다. 니가 거기를 안 가봐서 그렇다고.

그래서 나는 여러 사람 듣는 앞에서 호언장담을 했다. 내가 이태원에서 밤샌다. 서울 한복판에서 그런 엄청나게 엄청난 일이 버젓이 일어날 리가 없다. 너 거기 몇 시간 있었어? 10시간? 콜! 나는 20시간 있다 온다. 내가 너보다 두 배 더 버틴다.

그렇게 큰소리칠 때만큼은 내가 쿨한 줄 알았다. 그놈의 술이 웬수지…

 

 

가보지 않으면 종잡을 수 없는 곳, 이태원동

이태원 지도

사실 이렇게 보면 정말 좁다.

다음날 아침 지끈거리는 머리를 움켜쥐고 세 시간 동안 인터넷을 뒤적거렸다. 인터넷에서 '이태원'을 검색하면 크게 세 가지의 정보가 뜬다. 외국식 별미나 분위기 좋은 라운지 바를 셀카와 함께 올리는 블로그 글들, 사진을 첨부하지 않고 글자로만 구성하는 게 법칙처럼 돼 있는 “이반 언덕” 경험담들(규가 한 얘기가 여기에 가깝다)

그리고 좀 뻘쭘하지만 “한남2구역” 재개발 관련 뉴스들.

상상이 가는가? 맛집과 게이바와 철거 직전의 건물들이 반지름 200m의 원형 구역 안에 오밀조밀 모여 있단 말이다.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스트리트 뷰'와 지도를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그 작은 동네에서 이렇게나 다양한 사진과 글과 뉴스가 나온다니 믿을 수 없었다.

진짜로 궁금해졌다. 이태원에 가 보고 싶어졌다. 사실 나의 이태원 데뷔이기도 했다.

 

 

이태원의 구조: 한 그릇의 짬짜면처럼

이태원역 내부

카메라와 나름의 노숙 준비를 해서 토요일 밤 9시에 이태원역에 내렸다. 그 한산한 6호선에서 유독 그곳만 북적인다. 이태원역을 중심으로 일단 주변을 다 돌아봤다.

이태원은 마치 짬짜면처럼 생겼다. 이태원을 직선으로 가로지르는 왕복 4차선 도로를 기준으로, 왼쪽은 라운지 바와 각종 음식점, 주점, 펍이 즐비하고 해밀턴 호텔이 있다. 오른쪽이 바로 그 악명 높은 “소돔과 고모라” 구역이고 파출소가 있다. 그리고 짬짜면 그릇이 짬뽕과 짜장을 한번에 둘러싸 담아내듯이 이 두 구역을 바깥에서 감싸는 지역이 있는데 그게 바로 ‘한남2구역’이다.

그리고 그 구획 구분이 정말 똑 떨어진다. 왼쪽이건 오른쪽이건, 언덕을 쬐끔만 올라도 한순간에 ‘이태원’이 사라지고 평범한 동네 뒷골목이 나온다. 이태원을 뒤끝 없이 즐기고 싶다면, 당신이 선택한 구역을 벗어나지 말라고 권하고 싶다. 실컷 잘 놀아놓고 괜히 다른 골목 기웃거리다가 그 인적 없는 어두운 마을을 보게 되면, 갑자기 해가 뜨면 돌아갈 일상이 느껴져 술맛이 뚝 떨어질지도 모르니까.

짬뽕과 짜장이 완전히 다르(지만 근본적으론 비슷하)듯이 이태원의 호텔 쪽과 파출소 쪽도 서로 크게 다르다. 호텔 쪽은 주로 복장에 힘 잔뜩 준 신여성들이 많이 오가고 별로 시끄럽지 않으며 12시쯤이 되면 거짓말처럼 문을 닫는다. 반면 파출소 쪽은 스니커 구겨 신고 가볍게 놀러 나온 남자 손님들이 주로 돌아다니며, 엄청나게 시끄럽고, 동틀녘까지는 불야성을 이룬다.

 

이태원의 시간표: 그곳의 스케줄에 맞춰 놀아라

일방통행길

이태원 거리는 정말 정확한 시간 계획에 따라 움직인다. “좀 늦은(이른) 것 같지만 지금 가도 설마 뭐 있겠지” 하면서 안일하게 아무거나 입고 아무 때나 갔다가는 큰코다친다.

중요한 타임은 크게 네 가지다. 밤 9시 반, 24시 50분, 오전 3시, 새벽 5시 반.

 

1. 밤 9시 반

이태원을 정말 가볍게(또는 오랜만에) 즐기고 싶어서 퇴근길에 친구나 애인 손 잡고 오는 종류의 사람들은 이때쯤 거의 모두 체크아웃을 한다. 길에서 모자나 T셔츠를 파는 ‘이태원동 상인회’의 아주머니들도 이런 사람들이 주 고객층이기 때문에, 이 시간쯤 되면 노점 카트를 차고지(?)에 넣어두고 일제히 철수한다. (그랬다가 다음날 12시 이후에 다시 나온다고 한다.)

노점상 카트들이 초저녁(?)에 일사불란하게 줄을 지어 골목으로 들어가는 장면은 이때만 볼 수 있는 이태원의 진풍경 중 하나이다. 한편으로는 ‘이태원의 밤을 만끽하기로 작정하고 나오는’ 손님들이 혼자서 또는 여럿이서 이태원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2. 0시 50분

늦은 버스

이때 지하철 막차가 끊긴다. 따라서 오늘 안에 집에 가야 하는 사람들은 이때가 되기 전에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지하철 입구 앞에서 버스킹을 하던 2인조 밴드도 15분쯤이 되니 조용히 짐 꾸려 퇴장했다. 이때쯤 순경의 눈치를 보던 택시들은 대놓고 이태원로에 줄을 서서 호객을 시작한다.

물론 오늘 살고 죽을 것처럼 노는 분들에게 이 시점은 아무 의미가 없다. 다들 클럽이든 술집이든 선택해서 진작부터 놀고 있을 시간이다. 따라서, 거짓말 같겠지만, 밤 1시부터 2시 반 정도까지 이태원의 모든 거리는 잠깐이지만 꽤 한산해진다. 심지어 ‘오빠’를 부르려고 출입구 앞에서 폰 만지며 대기하던 대여섯 명의 ‘언니’들도 다 사라진다.

그리고 내 기억이 맞다면 대략 이때쯤부터 외국인이 안 보이기 시작한다. 이태원이 “음악이 있어 사랑도 있어 세계가 있어”라고는 하지만, 어리숙한 미군 병사들이나 클럽에서 놀다가 경찰에게 걸려 끌려나오는 정도고, 외국인이 운영하는 음식점이나 가게들도 이때를 즈음해서 하나둘 문을 닫는다.

 

3. 오전 3시

이태원이라는 이름에서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런 광경이 뿜어져 나온다. 요즘은 뭐 하고 사는지 궁금한 2AM의 노래가 소프트하다면, 이태원의 3:00 AM은 차라리 짐승감성에 가깝다. 거친 웃음소리와 왁자지껄한 남자들의 농담 소리, 고함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가 보면 ‘우사단로12길’이라는 일방통행 골목에 이르는데, 여기가 그 유명한 “게이힐(이반 언덕)”이다.

택시들의 호객은 이 시간에 절정을 이루고, 호텔 쪽의 바를 보면 테라스에 나와 바깥 구경을 하는 사람들이 유난히 많다. 이때쯤 트럭 포장마차가 큰길가에 들어서서 마지막 술 손님을 받는다. (이런 포차들은 초저녁이 퇴근 시간이라고 한다.)

4. 새벽 5시 반

이태원역 계단에서

웬만한 사람들이 슬슬 정신을 차린다. 밤새 놀다 지친 사람들 중 그래도 성실한 사람들이 첫차 타고 빨리 집에 가려고 이태원역 셔터 오픈 30분 전쯤부터 엉거주춤 여기로 모여든다. 그리고 때가 되어 셔터가 올라가면, 술과 담배와 땀과 기타 여러 물질로 절어 있는 파티 피플들이 좀비처럼, 하지만 질서 있게, 그 아래로 퇴장한다. 정신 못 차린 사람들은 대로변에서 괴상한 술주정으로 주변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기도 한다.

집에 갈 생각이 없는 사람들은 수면실, 다크룸, 이태원랜드, 모텔 등으로 들어가 규가 보았던 그런 레벨까지 들어가거나 아니면 아침 해장을 하려고 먹자골목으로 들어간다. 그래서인지 이태원의 이른 일요일 아침에 사람들은 주로 식당에 들어가 있다. 그 자리에서 밤을 샌 건지 다른 데 있다가 방금 들어온 건지는 구별이 되지 않지만.

그리고 이때부터 대대적 거리 청소가 시작된다. 용산구가 고용한 수십 명의 청소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는 것을 지켜보고 있으면 이태원이 그렇게 광활해 보일 수가 없다. 날 밝은 이태원의 색깔은 딱 회색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저녁이 될 때까지 있어봤지만, 그 사이에 이태원에는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귀가 행렬은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계속된다. 그러다가 정오가 되면 노점 상인들이 다시 출근하지만 여전히 조용하다. 언제까지? 다시 사람들이 퇴근해서 이태원에 기분 좋게 도착할 즈음까지. 이제 당신이 이태원에 갈 때 어느 시간대를 골라서 즐겨야 될지 알 수 있을 것이다.

 

 

20대, 이태원에 억지로 가려고 애쓰지 마

이태원 청소년 공부방. 토요일 저녁 늦게까지도 운영하고 있었다.

이쯤 되면 느끼겠지만 이태원은 절대 무법방종이 허락되는 카오스의 세계가 아니다. 오히려 오랫동안 자연스럽게 형성된 시간 계획에 맞추어 환락과 공백이 칼같이 등퇴장을 반복하는 곳이다. 그저 자기가 그 스케줄 중 어느 때를, 그 공간의 어느 구역에서 즐길 것인지를 정해서 돈을 많이 갖고 들어가서 놀면 되는 약간 색다른 유흥가일 뿐이었다.

내가 왜 소돔과 고모라임? 사우나 온천탕인데 ㅇㅇㅇ

내가 왜 소돔과 고모라임? 사우나 온천탕인데 ㅇㅇㅇ

일요일 낮 세 시, 이태원랜드 앞의 가파르게 깎아내린 계단에 걸터앉아 한참 주변을 둘러보고 생각했다. 어쩌면 실제로 있었던 그 옛날의 소돔과 고모라는, 우리가 지금 알고 생각하는 그런 퇴폐의 도성까지는 아니었던 것 아닐까? 정말 심각한 도덕적 타락이 있었다면, 하느님의 분노 이전에 그곳 주민들의 항의가 있지 않았을까?

사실 그들의 문란함은 신이나 싫어할 수준이지 사람이 질색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 아닐까? 그곳도 어쩌면 새벽 3시까지만 시끄럽고 그 이후에는 조용히 자기들끼리 숨죽여 노는, 그래서 겉으로는 아무도 아무에게 간섭하지 않고 피해 주지 않으면서 세련되게 노는 ‘다문화 마을’이었던 것은 아닐까? 만약 내 생각이 맞다면 이태원은 소돔과 고모라가 맞다. 또는, 그저 재개발 반대파가 붉은 깃발로 항의 표시를 하며 찬성파와 팽팽하게 대립하는 서울의 흔한 풍경일 것이다.

이태원 깃발

무속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게 절대로 아니다. 재건축 반대 깃발이다. 이것도 모르는 사람이 이태원을 안다고 말하긴 곤란하다.

그러니 이 글을 읽고 있을 당신에게 말한다. 굳이 이태원에서 놀겠다는 생각으로 애쓰지 말라고. 물론 재개발이 시작되어 그 거리가 사라지기 전에 가보는 것이라면 적극 권하고 싶지만, 자기가 좋아하지도 않는데 “이태원”이라는 네임밸류 하나 때문에, 화제라서, 남들이 한번쯤 가볼 만하다고 해서 굳이 받아들여 억지로 즐길 필요는 없다고 말이다. 만약 당신이 마음내켜 이태원에 가게 되거든, 당신 마음에 드는 구역에서 시간과 분위기에 맞게 잘 놀면 된다. 그러다가 기분이 최고로 좋은 딱 그 순간에 막차나 택시나 첫차를 타고 집에 가라.

정말 그거면 된다.

이태원의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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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어진

김어진

Twenties Timeline 피처 디렉터. 상식이 모자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