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는 취미를 갖자] ③ (남들과는 조금 다른) 연필

세상을 조금 다르게 만나고 싶은 당신, 연필을 가져라.

내가 연필을 가지는 이유

생각해 보면 정말 이상한 광경이었다. 초등학교 때까지 다들 잘 쓰던 연필이, 학년이 오를수록 점점 주변부로 밀려났던 것이다. 중학교 1학년 1학기 때 모두가 당연하게 볼펜과 ‘샤프’를 꺼내 교과서에 밑줄을 긋는 것을 보고 속으로 꽤나 혼란스러웠다. 아니, 공부용 필기구란 건 다양한 굵기의 선을 자유롭게 그을 수 있으면서도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지우개질할 수 있어야 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왜 연필을 안 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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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외치고 싶다!! 아이 해브 어 펜슬!!! ⓒAVEX Entertainment

딴에 항상 2B 연필만 고집하던 그 중딩은 B심 샤프심의 존재를 알고 나서야 간신히 샤프펜슬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후 한동안 그걸 잊고 살았던 그는 어느 순간부턴가 다시 기회 닿는 대로 연필을 쓰기로 마음먹고, 연필을 하나둘 사서 쓰고 모으며 취미를 붙인다. 그러다 보니 다시 한 번 새롭게 느낀다. ‘비표준’을 수집하고 사용하며 주변적 존재가 되기로 결정하면, 이 세상이 얼마나 낯설고 갈 길 먼 곳으로 다가오는지를.

 

연필을 가지면 일어나는 일

1. 생각과 작업이 나만의 템포로 조정된다

연필은 필연적으로 한 박자 느린 필기구다. 일단 수시로 깎아야 하고, 가끔 연필깎이 속의 연필밥을 버려야 하고, 연필을 쓸 지면을 확인한 다음에야 쓸 수 있다. 그나마도 당신의 필압에 따라서 작성 속도가 조금 혹은 많이 느려지는 것이 바로 연필이다.?외제 볼펜이나 사인펜, 네임펜 같은 ‘펜’들은 아무 때나 아무데서나 미끄러지듯 잉크가 줄줄 나오도록 만든 것인 반면, 연필은 순전히 흑연 막대를 나무나 종이로 감싼 것일 뿐이라서 그렇다.

펜 같은 것을 쓰다 보면 놀랄 때가 있다. 자기 머리나 눈이, 필기구를 쥔 손을 못 따라가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수업 필기를 정신없이 ‘하이텍씨’ 같은 것으로 받아적거나 노트북 키보드 혹은 휴대폰 터치 화면으로 뭔가를 마구 써내려가던 중에 문득 ‘내가 뭘 쓰고 있지?’ 하는 당혹감을 느낀다면, 연필을 집어 보기 바란다. 연필을 가지고 하는 작업은 거의 정확하게 당신의 생각의 속력과 같은 속력으로 진행되고, 그래서 조금 더 알차고 빠짐 없는 내용을 구성할 수 있게 된다.

타자기 대회

어휴 내가 지금 뭐라고 치고 있는 거람?

2. 본의 아니게 창의적이 된다

연필은 닳고, 무디어지고, 부러지는 필기구다. 연필로 긋는 획의 굵기는 결코 일정할 수가 없으며, 사용하다 보면 흑연 가루가 흩날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고, 아무리 좋은 종이와 지우개의 조건이 갖춰져도 결국 연필 자국을 지우개질한 흔적은 종이 위에 남고 만다. 단점을 나열한 거냐고? 아니, 이 필기구에만 있는 특징을 나열한 것뿐이다. 적어도 내가 연필을 쓰면서 만난 이런 특징들은, 내게 의도치 않은 영감과 발상 전환의 계기를 마련해주곤 했다.

예컨대 연필은 새로 깎자마자 긋는 날카로운 선과 나중에 무디어졌을 때 나오는 선, 비스듬히 눕혀서 아주 약한 필압으로 긋는 회색조의 색칠이 다 다르다. 이런 특징들을 알고 나면 자연히 필기 옆에?그림을 그리게 된다. 이런 식으로, 연필은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일정 수준의 창의적 표현을 할 수 있게 유도하는 신기한 필기구다. 다른 필기구로도 가능한 일 아니냐고? 해 보라. 의외로 ‘이런 거 그릴 때는 연필만한 것이 없군’ 하고 느낄 때가 있을 것이다.

김어진 연필

왼쪽부터 FIKA 종이연필, 동아 오피스펜슬 나무연필, 중국제 신문지연필, Adidas Impossible Is Nothing 프로모션 물자 나무연필, 말레이시아 Old Town Coffee 물자 나무연필, 책읽는사회만들기국민운동 브랜드 나무연필, 한국예수전도단 서울대학사역 브랜드 종이연필. 모두 에디터의 것.

3. 세상이 얼마나 꽉 막혔는지 아주 약간 볼 수 있다

연필을 쓰는 것이 구박 받을 일은 아니다. 죄는 더더욱 아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어디 가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연필을 쓰겠다고 하면 죄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사람들이 보기에 연필이란 광택 있는 종이는 못 쓰는 등등 꽤 까다롭고, 때가 되면 번번이 연필깎이에 넣고 돌려야 하며, 선명하지도 빠르지도 않은 선을 꾹꾹 눌러 가며 하나씩 긋고 있는, 속 터지는 구식 필기구일 뿐이기 때문이다. 문득 생각한다.?장애인들이 이런 기분일까?

하지만 연필은 결정적인 순간에 역사를 움직이며 지금도 여전히 주요 공산품으로 생산되는 문구다. ?미국의 NASA?연구원들이 거액을 들여 ‘무중력 환경에서 작동되는 볼펜’ 연구를 하면서 “러시아인들은 연필을 쓴다더라” 코웃음쳤다고 하는데, 글쎄, 이건 러시아의 승리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래서 연필을 잡고 있으면 조금은 희망을 가질 수 있다.?아직 이 세상은 모두에게 무조건 날카로운 펜촉, 부러지지 않는 바디, 강력하고 짙은 잉크만을 요구하는 지경까지는 가지 않은 모양이라고.

 

연필을 가질 수 있는 곳

이런 처지에 있는 연필에 왠지 정이 가서 취미를 붙이기로 결정했는가? 좋다. 우선 패션문구를 취급하는 쇼핑몰에서 마음에 드는 연필을 한두 자루 사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요즘은 종이 연필 5개입 세트가 대세니까, 가격도 3천~6천 원선에서 해결된다. 하지만 장담하건대, 연필을 오직 사서 모으기만 하다 보면?두 타스째가 못 되어서 ‘나만의 것’이란 느낌을 받지 못해 갈증이 날 것이다. 그때부터는 ‘브랜드 연필’을 수집하는 것이 좋은 방향이 될 수 있다.

FIKA 연필

스웨덴 카페 브랜드 피카(FIKA) 연필 1자루 1500원. ⓒFIKA

연필은 자사 로고를 찍어서 소모품 + 판촉물로 쓰기 딱 좋은 필기구다. 그래서 요즘은 웬만큼 센스 있는 회사라면 자기들의 브랜드나 상호명, 특정 문구를 인쇄한 ‘브랜드 연필’을 만들어 사용하거나 판다. 파는 경우에는 사 오면 되고, 팔지 않는 연필 역시 양해를 구한 다음 한 자루쯤 ‘겟’하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런 것들을 모은다는 생각으로 연필을 찾아다니다 보면, 연필을 쓰는 것을 넘어서 모으는 취미에도 자연스럽게 재미가 붙을 것.

나의 연필 컬렉션에는 ‘아디다스’, ‘한국예수전도단 서울대학사역’, ‘피카(FIKA)’,?심지어는 말레이시아의 카○베네에 해당하는 ‘Old Town White Coffee’ 연필도 있다. 그런 곳이 있었는지, 그런 곳에서도 연필을 만들었었는지가 놀라운가? 만약 그렇다면, 아직 당신은 이 세상을 미처 다 보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연필을 쓰고, 모으고, 찾아다녀 보라. 이 세상이 얼마나 프린터와 유성펜 위주로 돌아가는 세상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존재들이 여전히 세상을 버텨 주고 있는지 몸으로 체험할 수 있다. 이토록 부담 없는 취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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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어진

김어진

Twenties Timeline 피처 디렉터. 상식이 모자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