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리포트 수업을 무시하면 좋대는 거예요
우리끼리 얘기니까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자. 리포트가 과연 ‘꿀’인가? 알 만한 대학생들은 다 안다. 그건 초보들이나 하는 소리. 조별 과제 없고 중간 기말 없다고 해서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거.
일단 ‘리포트 대체 수업’들은 수업 계획서에 써 있는 것보다 훨씬 수준이 높다. 대충 써 냈다가는 F보다 더 무서운 C- 를 찍고 나오기 쉬운 함정 과목인 것이다. 가끔 친절한 교수님들이 있어 “보고서 평가 기준”을 사이버 강의실에 올려주시는데, 딱히 그걸 본다고 해결되는 것은 없다. 무슨 석사 졸업 논문쯤 되는 수준의 내용을 5주 만에 5장 이내로 써서 내라고 하시니.
그리고 또 읽어야 하는 부교재와 참고자료는 왜 그렇게도 구하기 힘든지? 아무리 빨리 도서관과 교내 서점에 가 보아도 항상 전부 대출중, 재고 없음이다. 천신만고 끝에 중고서점에서 책을 구해 보고서를 쓰려고 해도 무슨 말인지 도통 알 수가 있어야지. 게다가 리포트 제출 날짜는 어쩜 그렇게 항상 담합이라도 한 듯이 두세 개가 한 번에 겹치는지 모르겠다.?심지어 시각도 똑같아. “모월 모일 23시 59분까지만 받고 0시부터 안 받습니다.” 아무리 읽어도 모르겠고 아무리 고쳐도 자신 없고 아무리 빨리 하려 해도 시간이 모자라니 “죄송해요 저 리포트 쓰러 가야 해서 ㅠㅠ 먼저 갈께요 ㅜㅜㅜ” 인사하고 각종 모임에서 빠져나오는 자신의 모습을 서글퍼할 수밖에.
그리고 마침내 찾아온 마감 전날, 당신의 노트북은 강의자료 PPT, 고치고 지우기를 몇 번이나 반복한 '중간리포트_진짜 마지막.hwp’ 혹은 '빈 문서 2’ 파일, 그리고 웹툰 정주행 화면으로 빽빽하다. 머릿속은 텅 비어 있고 가슴에는 후회가 가득하다.
그래서 리포트 쿼터제라는 걸 생각해 봤단 말야
위의 경우는 비단 당신만의 고통은 아니다. 많은 대학교에서 ‘리포트’의 세계는 무법천지에 가깝다. 레포트 갯수부터 그 분량(글자 수, 페이지 수 등) 그리고 스케줄까지 어떤 것도 제도화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고스란히 우리들이 겪는 물적, 심적 피해로 돌아온다.
이 모든 폐해를 획기적으로 줄여 줄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소개한다. 이름하여 리포트 쿼터제.
내용은 간단하다. 모든 리포트 제출 수업에 제출 기한을 일괄 배정시키고 작성 가이드를 수업계획서에 명시하게 한다. 예를 들면 이렇다. 월+수 1교시 수업이라면 2주차 금요일부터 3주차 화요일까지, 화+목 5교시 수업이라면 4주차 월요일부터 4주차 금요일까지 하는 식으로 리포트 접수 기간을 서로 겹치지 않게 설정한다.
그게 가능하냐고? 불가능할 수가 없다. 낙성대학교의 예를 들어 보자.
이런 시간표로 돌아가는 학교라면 “리포트 제출 기간”을 다음과 같이 갈라 놓으면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모든 과목마다 5일의 여유가 주어지며, 서로 겹치지 않는다. 그리고 설마 A부터 J까지 모든 시간을 다 채우는 괴물이 있겠어? 중간중간에 여유 시간이 자연스럽게 확보됨은 물론이다.
생각해 봐, 이건 진짜 되는 거라니까
이 제도는 단점은 거의 없고 장점만 가득한 놀라운 제도다. 허풍이 아니다. 단점이 적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결론부에서 말하기로 하고, 일단은 장점부터 정리해 보자.
모두가 안심하는 일정 운영 가능
‘학기 중 3회’ 같은 애매모호한 스케줄 때문에 서로 얼굴 붉힐 일이 없어진다. 그 수업에는 그 수업을 위한 리포트 제출 기간이 정해져 있으므로, 교수자들은 그 리포트를 중심으로 효율적인 수업 진도 계획을 실행할 것이며, 수강생들은 일정이 갑자기 변할까 조바심 내지 않아도 된다.참고자료 부족 현상 해결에 기여
교수자들이 학교에 강의계획서를 낼 때부터 이미 어떤 자료가 필요한지를 써 놓기 때문에, 언제 몇 명의 학생들이 어떤 특정 자료를 요청할지 도서관 측에서 조회해볼 수 있게 된다. 머리수에 맞게 미리 사본이나 기타 대책을 준비하는 것도 가능하다!리포트 작성의 집중도와 효율성 향상
무엇을 언제부터 언제까지 작성해야 한다는 인식이 수업시간표 확정 단계에서 분명해지기 때문에, 수강생들은 각자 자기가 언제 어떤 과목 리포트에 집중해야 하는지가 분명해진다. 끝내 놓고 한숨 쉴 때 맘 놓고 놀 수 있다는 건 말할 것도 없고.확실한 중간평가, 적극성 증대
리포트와 기말고사가 병행되는 수업일 경우, 교수자들은 그저 리포트 채점 기준과 채점 결과를 통지하는 것만으로도 시험 준비에 대한 수강생들의 열의를 증대시킬 수 있다. 주어진 마감 날짜 맞춰서 집에서 써 온 답도 그 모양인데 시험은 오죽하겠어? 긴장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그렇다, 리포트 제출 관련 일정을 일괄 지정한다는 아이디어 하나가 학생에게도, 선생님들에게도, 조교들에게도, 심지어 도서관 복사실 아주머니에게도 도움이 된다!
어디 걱정되는 거 있으면 말해 봐
이 제도에 대해 크게 두 가지 반론이 제기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씩 살펴보자.
그 많은 수업들의 그 많은 리포트 제출 기한이 어떻게 하나도 안 겹칠 수 있어요?
첫째, 모든 수업이 리포트를 반드시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모든 수업’이라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한 학생이 4~8개 과목을 수강하는 것이 보통이므로 이것을 고려하여 일정을 배분하면 된다.
둘째, 앞서 예를 들었던 “중간은 리포트, 기말은 지필시험” 같은 수업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 반대도 많을 것이고. 물론 보고서로만 모든 평가를 진행하는 과목도 있을 것이다. 이 비율을 적절하게 배치하면, 충분히 스케줄을 지정할 수 있다.
셋째, 설령 적절한 배치가 어렵다 하더라도, 몇 개 과목이 하루 이틀 겹치는 정도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마감날짜”가 아니라 “제출기간”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제도가 없을 때가 보고서 마감날짜 겹칠 확률은 훨씬 더 크다. 당장 지금 우리가 그렇지 않은가.
그러면 결과적으로 리포트 1건 쓰는 데 1주일도 못 쓸 것 같은데요, 그러면 안 되지 않나요?
바로 여기가 리포트를 대하는 우리의 시각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지점이다. 되물어 보고 싶다. 리포트 1건을 쓰는 데 왜 1주일 이상이 소요되어야만 하는가?
도대체 리포트란 무엇인가? 직장 상사나 지휘관이 “이봐 나 XXX에 대해 잘 모르니까 거기에 대해 리포트 써 와” 할 때의 그 리포트인가? 그렇다면 엄밀하게 정성 들여 쓰는 것이 맞다. 하지만 우리가 대학에서 쓰는 “리포트”란 그런 것과는 거리가 있지 않은가? 생전 처음 배우는 내용이 주제고, 그것에 대해 배운지는 석 달도 못 되었고, 무엇보다 평가를 받기 위해 일회용으로 작성·제출하는 지극히 도구적이고 수단적인 문건이 리포트 아닌가?
그렇다면 리포트를 쓰는 데 필요 이상으로 많은 정보와 지식, 작문상의 수사와 디자인적 장식이 투입되는 것은 뭔가 이상하다. 수강생이 교수자의 학습 목표를 얼마나 달성했는지만 정확하고 담백하게 보여주기 위한 문건이 리포트 아닌가. 지금 우리가 리포트에 대해 느끼는 부담감이 단순히 ‘헐 공부 안했는데 ㅠㅠ’만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 보자. 우리는 보고서를 쓰면서 얼마나 배운 ‘티’를 내느냐, 얼마나 깔끔해 보이고 정돈된 것처럼 보여주느냐, 교수님의 지적 성취도와 취향에 얼마나 비위를 맞출 수 있느냐를 걱정하는데, 이건 리포트 과제를 처음 생각해 낸 사람이 의도한 목표는 절대 아닐 것이다.
안심해도 좋다. 이 제도가 시행될 경우 제일 당혹감을 느끼는 것은 수강생이 아니라 교수진이다. 3~5일 동안 작성해 내는 숙제는 일정 분량 이상으로 많아질 수 없고, 그렇다면 채점의 공정성을 위해 평가 기준이나 교수자의 채점 자세가 본격적으로 진지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수님들은 보고서 과제를 낼 때 ‘지금까지 배운 내용에 대한 요약’처럼 무성의하게 내지 못하게 된다. 그 과제는 여러분이 3~5일을 투자해서 진지하게 공부하면 제대로 쓸 수 있는 주제로 부여될 것이고, 여러분은 그냥 열심히 공부한 것을 워드로 쳐서 내면 된다.?리포트 과제의 본연의 목적이 달성되는 순간이다.
남이 C 받기만을 바라지 말고
이 제도의 단점이 의외로 쉽게 발견되지 않는 이유를 이야기하며 마무리를 짓고자 한다. 그 답은 간단하다. 아직까지 리포트 과제를 위한 이렇다 할 제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텅 빈 종잇장은 그 자체만으로는 정말 아무 느낌도 일으키지 않지만, 하다못해 문장 하나만 그 위에 적어도 뭔가 그럴듯해 보이고 이제 뭐가 좀 시작되는 듯이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지금까지 그랬듯 앞으로도 리포트 제출 과제는 대학 생활에 빠지지 않는 중요 요소가 될 텐데, 아직까지 아무도 이 리포트 때문에 겪는 불편에 대해 ‘제도’를 설계하거나 구상하지 않았다는 것은, 솔직히 말해 지금까지도 조금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다.
물론 이 기사에서 미처 다루거나 생각지 못했던 부작용이 실제 실행 과정에서 안 생길 수는 없다. 하지만 그건 또 그 때 가서 개선점을 찾으면 된다. 우리가 기억할 부분은 두 가지다. 첫째, 보고서 제출 과목을 우리가 실제로 공부해야 한다는 것. 둘째, 기왕 쓸 보고서라면 제대로 된 가이드 아래서 혼란 없이 차분하게 쓰고 싶다는 것.
자, 이제 무엇을 하면 되느냐? 학교 공지사항들을 잘 찾아보면 각 학교마다 ‘학사제도 공모전’ 비슷한 것을 가끔 주최할 것이다. 그야말로 학사제도에 관한 새로운 제도나 제안을 받아들이고 우수 제안자를 시상하는 이벤트다. 여러분의 학교 사정에 맞게 이 아이디어를 조금 조정해서 학사제도 공모에 도전해 보는 것은 어떤가? ‘시험 없음’의 사탕발림에 꼬여 리포트 지옥에 파묻혀버린 여러분의 학우들 얼굴을 생각해 보자. 그들의 표정이 다음 학기에 활짝 피느냐 마느냐는, 이제 여러분이 리포트 쿼터제를 학교에 건의하느냐 마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니.
세 줄 요약
1. 리포트 마감날이 자꾸 겹치니까 힘들었다.
2. 안 겹치는 제도를 만들면 좋나 좋아진다.
3. 학교에 건의해봐 ㅇ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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