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진이 그저 사람 많고 꽉 막힌 곳이라고만 생각하니?
노량진은 흔히 엄청나게 붐비는 모습으로만 묘사된다. 수산시장이 그렇고, 노량진역 부근의 학원가가 그렇고, 노량진동의 빽빽한 주택가와 언덕길이 그렇다. 실제로도 노량진은 사람 많고 복작복작한 곳이다. 여기까지는 서울의 다른 번화가와 하등 다를 게 없다. 다만 명동에는 ‘요우커’가 좀더 많고, 노량진에는 학생이 좀더 많고, 강남에는 직장인들이 좀더 많은, 뭐 그런 정도까지만 이해되고 있을 터이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노량진 주변 지도를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노량진 일대에?공터가 의외로 많다는 사실이 눈에 띄었다. 물론 주택가가 빽빽이 들어찬 탓에 드문드문 보이는 공원들이 한층 더 푸릇푸릇해 보였던 것도 있었겠지만, 그냥 모두가 ‘사람 많고 붐비는 곳’, ‘삭막한 곳’ 정도로만 이해하고 소비하는 곳에 공원이 이렇게나 갖춰져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래서 잠시 다녀왔다. 그리고 느꼈다. 노량진에 이렇게나 다양하게 공원이 있다는 것은 어쩌면 좀더 심오한 의미를 갖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송학대공원: 익어가는 사랑을 위한 특별한 데이트 코스
지도에는 노량진 근린2공원이라고 표기돼 있고, 버스 노선도에는 아예 언급이 돼 있지 않으며, 지역명을 따서 ‘송학대공원’이라는 제대로 된 별명도 갖고 있는 이 공원은, 그래서 숨겨져 있고 특별하다. 처음 마주치는 공터는 조금 서운한 느낌을 준다. 정자, 조그만 놀이공간, 무대 정도만 갖춘 ‘공터’이기만 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지 않고 양 옆으로 나 있는 언덕길과 오솔길을 따라가 보면, 그제서야 이 공원의 진가를 맛볼 수가 있다. 양 옆으로 무수히 뻗어나온 단풍나무를 감상하며 걷다 보면, 또 하나의 작은 공터와 정자, 또 다른 벤치들, 아까와는 다른 풍경과 색채가 펼쳐진다. 이곳에서 머리 위로 탁 트인 하늘과 노량진 전경, 한강, 여의도를 내려다보는 것은 실로 특별한 경험이다. 발품을 팔고 약간의 모험을 하는 그만큼 보상해 주는 공원인 것이다.
이곳을 걷다 보면 절로 데이트가 하고 싶어진다. 그것도, 사귄 지 방금 막 되어 서로에게 어떡하면 더 예쁘게 보일까에만 골몰하는 시기를 충분히 지나, 서로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이런저런 미사여구 대신 조용히 단지 같이 걷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경험을 하고 싶어지는 그 시기의 데이트를 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마을버스를 함께 타고, 적당한 높이까지 올라가 벤치에 앉아 주변을 바라보면, 정말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다. 우린 여기까지 왔구나, 라고.
그것은 미디어와 사회가 사랑을 하는 청년들에 대해 늘어놓는 스테레오타입을 조금 비껴가는 모습이다. 사실 우리의 연애의 모든순간이 “오빠 여기 아닌 거 같아” “아냐 좀만 더 가면 있어 너 나 믿지?” 따위 자질구레한 밀당이나 미숙함, 왁자지껄함, 마시고 흔드는 올나잇이기만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 이 시기를 화양연화로 누리고 싶은 익어가는 연애의 한가운데 있는 청년들에게, 노량진은 송학대공원이라는 공터를 하나 열어두고 있었다.
노량진 “백로어린이”공원: 세상을 피해 숨고 싶은 청춘의 거점
장승배기역 근처에는 무명의 작은 공원이 있다. (지도 서비스에 따라서 이름이 조금씩 다르다. 백로어린이공원이라고 나오는 곳이 있고, 명칭 표기가 없는 곳이 있다. 심지어 공원 정문 간판에는 한자로 “노량진공원”이라고 적혀 있다.) 그렇다고 지도상으로만 존재하는 허위의 공간이냐 하면, 그건 아니다. 엄연히 그곳에도 빈 터는 있었다. 동작12번 버스를 타고 동작청소년문화의집 정류장에서 내려 언덕길을 올라가면 만날 수 있다.
이곳의 구성은 독특하다. 국제난민보호운동을 하는 ‘피난처’라는 비영리기관의 사무소도 이 울타리 안에 있고, 세움교회라는 교회도 세워져 있으며, 구립 백로어린이집도 운영되고 있다. 공원의 한쪽 끝 가장 큰 정자에는 바람을 막는 벽과 테이블과 12인석?이상의 의자가 들어앉아 있는데, 어린이 놀이터와 운동기구와 간이 정자는 모두 같은 높이에 공존한다. 여기서는 누가 누구를 중간에 만나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더라도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동네 공원이라는 느낌 그 이상의, 조금은 수상하기까지 한, 재미있는 공원이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공원을 빠져나오려는 찰나, 여기라면 ‘숨어 지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범죄자나 현실도피자가 되어 노숙을 할 만한 은둔처라는 뜻이 아니다. 노량진 백로어린이공원은,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은 무명의 누군가가 최소한의 자기 관리를 위해 매일 아침 올라와서 조용히 운동과 사색과 잡담과 산책을 하다가 다시 돌아가 어딘가에 틀어박힐 수 있게 도와주는, 그런 목적을 가진 사람에게는 매우 훌륭하고 적절한 공간일 수 있겠다는 뜻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모든 청춘들은 안다. 세상은 우리를 도와 주지도 기다려 주지도 않는다는 것을. 그래서, 유일한 방법이라고는, 그저 스스로를 도울 자구책을 충분히 갈고닦다가, 세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을 때 정확하게 등장하는 것뿐임을. 다만 그걸 실천할 때와 장소가 부족해서 다들 이렇게 안달인 거겠지. 만약 당신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회오리바람 같은 세상으로부터 잠시 조금 떨어져서 호흡을 고를 용기가 있다면, 그런 당신에게도 노량진은 공터 하나를 내어줄 것이다. 그게 바로 백로어린이공원이었다. 심지어 이곳은 이렇달 이름도 없다. 당신의 무명 시절을 숨어 지내기에, 이렇게 좋은 빈터는 드물다.
노량진근린공원: 제대로 운동하고 싶을 때 딱 알맞은 곳
노량진 일대에서 가장 큰 공원은 노량진근린공원이다. 숭의학원 바로 옆에 있다. 이곳이 다른 공원이나 공터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여기는 쉬는 곳이 아니라 달리는 곳, 훈련하고 노력하고 땀흘리는 곳이라는 점이다. 물론 쉬어가는 공간, 산책하는 곳, 잠시 하늘을 보며 여유를 찾는 곳으로도 즐길 수 있지만, 시설이라든가 규모 등이 운동과 단련에 좀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
숭의여중고교 방면으로 진입하면, 일단 높게 나 있는 계단을 타고 올라가 배드민턴장을 만날 수 있다. 여기도 넓다고 생각한다면, 그 위로 한층 더 올라가 잔디구장을 마주칠 땐 기겁하게 될 것이다. 폭 50m 너비 100m에 달하는 잔디밭과 그 주변을 빙 둘러싸고 있는 러닝트랙이, 당신이 노량진에 대해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들을 일거에 무너뜨려 준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직이게 만든다.
애초에, 이 공원의 구조 자체가 운동을 안 할 수 없는 형태로 되어 있다. 한 바퀴가 300m나 되는 트랙이 있고, 동작구 한복판에 이렇게나 탁 트인 필드가 있으며, 잔디구장 주변 사방에는 테니스장, 각종 운동기구 등이 꼼꼼하게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운동을 하다가 쉬기 위해서는 트랙 한쪽 구석에 있는 하나뿐인 정자로 굳이 가거나 가장자리에 배치된 운동 기구 설비 쪽으로 가야 하는데, 그나마 거기 있는 운동 기구들도 동네 공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보다는 조금 더 본격적인 것들로 구성돼 있다.
심지어, 이번에 취재를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이 근방은 용마산이라는 산이며, 동작구는 이 산 주변을 산책하고 운동하며 즐기기 좋도록 아예 ‘동작충효길’이라는 길을 만들어 두었다. 그리고 이 길은 노량진근린공원에서 자연스럽게 다리 하나를 건너며 이어진다. 새벽에, 추리닝 하나 입고 땀 뻘뻘 흘리며 계단을 타고 언덕을 올라 공원까지 달려가서 떠오르는 아침 해 바라보며 잔디밭에 드러누우면 딱 알맞게 운동도 되면서 ‘청춘스러울’ 것임에 틀림없었다. 노량진은, 이런 종류의 트레이닝?필드도 갖춘 지역이었다.
무중력지대: 다시 돌아와 뭔가를 시작하려는 모두의 아지트
이쯤 하고 돌아가려고 대방역 쪽으로 가다가 생각이 났다. 대방역에 있는 무중력지대도 공터 비슷한 곳에 자리하고 있지 않았나? 기왕 여기까지 온 것 다시 확인하러 가 보기로 했다. 그리고 거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공터란 궁극적으로 무엇인지, 그것이 노량진과 무슨 상관인지에 대해 제대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무중력지대 일대가 공터이긴 했지만, 지금껏 만나 본 다른 곳들처럼 볼거리가 풍성하다거나 각별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거나 하는 곳은 아니었다. 조금 멋없게 묘사하자면, 큰길가에 우연하게 조성된 주말농장 터라고 말하는 게 정직할 것이다. 입구를 지나 들어와서 무중력지대 건물에 들어가기까지는 공터다운 공터가 없다는 생각에 초조했는데, 막상 무중력지대로 들어가니, 뭔가를 시작하고 계속하려 북적북적한 무중력센터 그곳 자체가, 바로 공터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단지 어떤 공간이 별다른 설비 없이 텅 비어 있다고 해서 공터가 되고 공원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공간의 목적과 가능성이 열려 있을 때, 여지(餘地)가 있을 때에야 비로소 그곳은 공원이고 공터일 수 있는 것이다. 오래된 연인들에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여지를 주는 언덕길이어야 한다든지, 자기 자신을 좀 숨기고 활동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든지, 어떤 종목의 운동이든 상황이 허락만 한다면 바로 할 수 있다든지, 청년다움이 있는 활동이면 어떤 것이든 시도해 볼 여지가 있으면, 그곳이 바로 공터다.
그렇게 생각하니, 노량진에 고시촌이 형성돼 있고, 이런 공원들이 있고, 무중력지대가 들어서 있다는 것이 다 하나로 모이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야말로, 우리 청년들에게 여지(“남은 땅”)를 주는 곳. 무작정 일단 환승부터 하라고 다그치는 신도림도 아니고, 한 뼘 땅바닥에도 주인이 있는 여의도도 아닌 곳. 자기에게 맞는 삶과 템포와 호흡을 찾을 수 있도록, 여러 가능성의 빈 터를 열어둔 곳.
그래서, 청년으로서, 왠지 나를 이해해 주고 기다려 주는 것 같은 노량진이, 그곳의 공원들이, 나는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활짝 열린 가능성의 장소가 필요한 청년 누구에게나, 비슷하게 그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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