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전 10시 3분, 강남
아무리 사람이 많고 빌딩이 많아도 나랑 무슨 소용인가. 뭔가를 하거나 먹지 않으면 앉을 자리 하나 없는 신세가 서글프다. 어쩐지 오늘은 남는 시간 동안 조용히 앉아 사색하는 품격을 누리고 싶을 때. 하필 그럴 때 강남에 있을 때.
기왕 이렇게 된 거 좀 더 강 남쪽으로 가보자. 신분당선으로 갈아타고 정자역 3번 출구로 가자. 쭉 걷다가 한 번 우회전하면 당신이 알고 있는 바로 그 네이버의 본사 건물이 나온다. 이 건물의 1층에는 눈을 사로잡는 디자인 전문서적과 잡지들이, 2층에는 백과사전 서가와 ‘스페셜 유저 체험박스’가 있다. 눈이 편해진다는 녹색으로 가득한 공간에서, 어디 가서 구할 수도 없는 희귀 자료를 마음껏 즐기자. 집에 돌아가는 만원 지하철에서 뒤늦게 아쉬워하지 말고.
2. 낮 1시, 대학로
연극의 거리, 마로니에, 그리고 낭만. 누구나 한 번쯤 품어 보는 ‘대학로 판타지’들. 하지만 프랜차이즈로 도배된 대학로를 조금만 거닐게 되면 환상은 환상일 뿐이었음을 알게 된다. 바로 그 대학로에서 시간이 남은 당신에게만 고백한다. 대학로에 남은 진짜 낭만을.
혜화로터리 쪽으로 쭉 걸어 올라가 보자. 혜화초교, 성북초교를 지나 성북구립미술관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안내 표지판까지 세워져 있는데도 숨어 있는 듯한 한옥을 발견했다면 바로 찾아간 것이다. 조심스럽게 발을 들여놓으면 소설가 상허 이태준의 생가를 전통 찻집으로 사용하고 있는 수연산방이 나온다. 천박하게 한옥 티를 내는 것이 아닌, 정말 품위 있고 고즈넉한 진짜배기 한옥의 모양새 그대로 살아 있다. 진짜 멋이 무엇인지를 음미하다 보면 대학로도 새롭게 보일지 모른다.
3. 낮 3시, 명동
사실 약속이 있지 않은 이상 굳이 명동에 갈 일은 잘 없다. 외국어가 점령한 거리를 걷다 보면 어쩐지 엄마도 보고 싶고, 삼삼오오 짝을 지어 다니는 커플들 덕분에 쓸쓸함은 배가 된다. 그러거나 말거나 당신과 만나기로 한 그들이 여전히 오는 중. 어쩌면 좋을까?
숱한 매스컴 소개보다 50년 이상의 역사를 더 자랑스럽게 여기는 진짜 중국집. 70년대부터 지금까지 세계 각국의 최신 잡지를 판매하며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제일서림. 외국 내음이 물씬 나는 것들이 가득한 만물상. 발걸음을 옮길 때 마다 새로운 상점들이 총 길이 330m 안팎의 거리에 가득하다. 기왕 이렇게 된 것 약속장소도 이쪽으로 옮기자. 무엇을 먹던 간에 명동 중심가보단 좋은 선택지가 될 것이다. 그렇게 기와지붕을 얹은 24층 높이의 중국 대사관 아래에서 이것저것 구경하다 보면 어느새 기다림은 즐거움이 된다.
4. 저녁 5시, 홍대
웬일인지 소개팅 애프터에 성공한 당신은 하루 종일 서울 어디가 좋을까를 고심한다. 결국 홍대라는 결론이 나왔지만. 상대에게 세련됨을 어필하고자 인터넷을 뒤적거려도 신통치가 않다. 그래도 어떻게든 “홍대거리”의 냄새가 풍기는 곳으로 골라 만나고 싶다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이름난 레코드샵 중 하나인 레코드포럼은 1995년에 개점해서 2012년에 건물 사정상 폐점했던 적이 있다. 다행히 카페와 병합해서 재개장한 역사가 있는 이곳은 오랫동안 클래식 & 재즈를 중심으로 다양하고 세련된 음악을 홍대 거리에 알려왔다. 매장에서 들려오는 음악을 듣고 있자면 그놈의 ‘홍대 감성’이 뭔지 절로 알게 될 것이다. 그 센스가 길거리에서 쿵짝거리는 감성과는 확연히 급이 다르다. 그렇게 낯설지만 편안한 음악을 함께하는 아메리카노 한 잔은, 어색한 첫 만남과 다르게 꽤나 달달할 것만 같다.
5. 저녁 7시, 사당
조별 과제인지 내 과제인지 알 수가 없다. 보다 못해 총대를 맨 후 사당에서 모이기로 한다. 약속에 맞춰 교대쯤 왔을 까, 갑자기 과반수가 못 온단다. 화가 난다. 이대로 집에 간다면 당신은 괜히 엄마한테 성질이나 부리다가 등짝이나 맞을 것이 틀림없다.
지금의 당신에게는 문화적 재충전이 필요하다. 조금만 방향을 돌리면 이수역이 보인다. 아트나인은 이수 메가박스의 12층에 있는데, 영화는 영화관에서 봐야 한다고 외치는 듯한 구조가 압권이다. 스크린이 약간 뒤로 기울어 있는 사소한 디테일을 보고 있자면 독립영화 전용관이란 이름이 거짓이 아님을 알게 된다. 거기에 적절한 조명과 세련된 분위기의 옥상정원도 빈틈없이 아름답다. 여세를 몰아 이곳에 오지 않았더라면 알 일 없었던 예술영화도 한편 봐 주자. 언제나 인류를 위로해왔던 예술이 당신을 따스하게 감싸 줄 것이다.
6. 새벽 1시, 건대입구
술 먹다 막차가 끊겼다. 남은 버스는 전부 집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달리고 있고, 2차를 가기에는 지갑 사정이 말이 아니다. 당연히 찜질방은 꿈도 못 꾼다. 멍하게 택시나 보고 있을 텐가. 우리의 밤은 아직 길다.
화양시장 한복판에 위치한 아늑한 규모의 연중무휴 오락실이 건대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비트매니아, 팝픈뮤직 등의 각종 리듬게임은 물론 이니셜 D, 철권, 하우스 오브 데드 같은 인기 게임 역시 잘 갖추어져 있다. 손가락이 예전 같지 않다면 오락실 노래방 부스가 당신을 기다린다. 무려 7칸이나 있어서 눈치 볼 일 없이 즐길 수 있다. 학원 빼 먹고 들킬까 봐 조마조마 하던 꼬꼬마 시절을 떠올리며 집중하자. 더 이상 당신에게 첫차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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