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정치인의 20대 ② 심재철과 유시민, 그리고 박종운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르는 법이다.

3. 서울의 봄을 꿈꾸던 심재철과 유시민

1979년.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탄에 스러진 후 신군부 세력은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손에 넣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신 아래에서 피어나기 시작한 시민들의 자유와 평등의 염원 역시 만만치 않았다. 1980년 5월, 일명 '서울의 봄'이 찾아온 것이다. 시민들은 오랜만에 찾아온 자유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서울역회군

1980년 5월. 서울역 앞에 모인 10만 시위대.

서울의 봄을 주도한 것은 학생운동 진영이었다. 서울대 총학생회에서는 학생들을 강제로 집체훈련에 동원하는 강제징집반대를 주제로 대정부투쟁을 예고하는 한편, 각 대학들도 가두시위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이에 신군부는 사회혼란을 막고, 좌익용공세력을 소탕한다는 명분 하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집단행동을 금지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월 15일, 학생들과 시민들이 합세한 시위는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10만명이 넘는 대규모 시위대가 서울역 앞을 가득 메우고 거리를 행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4.19의 기억이 떠오를 정도로 서울은 혁명전야의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이 때, 일군의 학생들이 모여있는 버스 한 대 위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학생운동 지도부 간의 노선차이로 격렬한 논쟁이 벌어진 것이었다. 한 쪽은 비둘기파를 대표하는 서울대 총학생회장 심재철이었고, 또 다른 한 쪽은 매파를 대표하는 서울대 총학생회 대의원회 의장 유시민이었다.

드라마 '제 5공화국'에도 등장하는 심재철과 유시민 ⓒMBC

드라마 '제 5공화국'에도 등장하는 심재철과 유시민 ⓒMBC

유시민과 신계륜 등 강경파는 이 상황에서 무기력하게 물러나면 반드시 보복을 당할 수밖에 없고, 다시 찾아오기 힘든 기회라며 계속해서 청와대를 향해 전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심재철을 대표로 하는 온건파는 자신들이 이 많은 인원을 통제하거나 책임질 수 없으며, 이대로 청와대를 향해 계속 전진하다가는 큰 희생을 치를 수밖에 없다며 해산을 주장했다. 격렬한 논쟁 끝에 결국 심재철의 주장이 수용된다. 그는 교육부장관과의 담판을 통해 학생들의 안전 귀가를 보장 받고 해산을 결정한다. 서울역 앞에 모였던 많은 학생과 시민들의 항의와 반발 속에 10만 시위대는 해산한다. 그 유명한 '서울역 회군'이었다.

그로부터 이틀 뒤인 5월 17일 신군부는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학생 시위를 차단하고자 각 대학에 휴교령을 내린다. 같은 시각, 이화여대에는 기동경찰대 수백명이 들이닥쳤다. 전국 대학의 총학생회장단이 모여 있는 회의장에 난입한 기동경찰대는 학생운동 지도부를 모조리 검거해버렸다. 그러나 그것은 비극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다음 날, 공수부대가 광주를 향했기 때문이다.

서울대 총학생회장이었던 심재철은 이후 MBC 기자를 거쳐, 신한국당에 입당해 지금은 새누리당의 4선 중진 의원이 되었다. 국회 세월호 특위의 위원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 그런 그가 며칠 전 한 법안을 내놓았다. 한 장소에서 30일 이상 집회를 하거나 문화재 근방에서는 집회 시위를 하지 못하게 규제하는 법안이었다. 특정 이슈마다 발생되는 시위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려는 의도가 다분한 법안이다. 1980년, 서울역 앞에서 그를 바라보던 10만명의 시위대를 생각하면 더욱 씁쓸한 장면이었다.

이제는 그냥 업무시간에 몰래 야짤보는 아저씨가 되어버린, 서울의 봄을 이끈 주역 ⓒ오마이뉴스

서울의 봄을 이끈 주역은 이제는 그냥 업무시간에 몰래 야짤보는 아저씨가 되어버렸다 ⓒ오마이뉴스

한편 심재철과 반대편에 서 있던 유시민은 독일 유학을 가게 된다. 이후 명문장가로 이름을 날리다가 개혁당을 거쳐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의 국회의원이 된다. 그가 국회에 첫 등원하던 날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정장 차림이 아닌 캐쥬얼 차림으로 한바탕 여론을 뒤흔든 것이다. 당시만 해도 정장 차림이 아니면 세상이 뒤집어지는 줄 알았던 국회의 권위주의를 타파하겠다는 파격적인 행보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여전히 개혁적인 그의 모습에 열광했다.

유시민 당시 초선의원을 보고서 노여움이 가득 묻어나는 어르신들 표정이 포인트

유시민 당시 초선의원을 보고서 노여움이 가득 묻어나는 어르신들 표정이 포인트

그러나 그의 정치는 평탄하지 않았다. 참여정부에서 보건복지부 장관이 된 유시민은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수용하고 옹호하는 모습은 많은 지지자들을 등돌리게 했다. 그의 대표적인 명문, 항소이유서에서 남긴 '그들이 옹호하는 ‘복지’란 독점재벌을 비롯한 ‘있는 자의 쾌락’을 뜻하는 말입니다'라는 말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이후 유시민은 절친 김문수와 경기도 도지사 선거에서 격돌하나 패배한다. 그리고 통합진보당 분당의 여파가 채 가시지 않은 2013년 추운 겨울의 어느날, 그는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서울의 봄을 이끈 한 주역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4. 박종철 열사가 죽음으로 지킨 선배, 박종운

서울대 언어학과 (당시 )3학년 박종철.

서울대 언어학과 (당시 )3학년 박종철.

"이 새끼야 가만 있어!"

1987년 1월 14일 어두운 신림동의 밤 골목. 건장한 체격의 사내 여섯 명이 한 청년을 우악스럽게 잡아챈다. 서울대 언어학과 학생 박종철이었다. 그렇게 박종철이 끌려간 곳은 군사독재 시절 악명 높기로 유명한 남영동 대공분실이었다. 많은 사회운동가들에겐 공포와 좌절의 대상이었고, 정권에게는 체제유지의 수단이었던 남영동 대공분실.

"며칠 전에 네 하숙방에서 자고 간거 다 알고 있어! 니 선배 박종운이 어딨는지 빨리 불어!"

영장도 없이 연행 된 박종철은 그제야 자신이 왜 이 무서운 곳으로 끌려왔는지 알 수 있었다. 핵심간부로써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를 이끌고 있던 선배 박종운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 자신을 불법연행 해온 것이었다. 많은 이들이 그러했듯, 박종철은 순순히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많은 이들에게 그러했듯 경찰은 박종철에게 잔혹한 고문을 시작한다.계속되는 전기고문과 물고문 끝에 박종철은 끝내 숨을 거두고 만다. 연행된 지 불과 열 한시간만에 그렇게 한 청년의 삶이 국가에 의해 져버리고 말았다.

죽은 박종철의 영정을 들고 행진하는 서울대 학생들. 마스크도 쓰지 않은 채 영정을 들고 있는 고향 후배 오현규는 2006년 부산 해운대구에서 한나라당 소속으로 구의원에 당선된다.

죽은 박종철의 영정을 들고 행진하는 서울대 학생들. 마스크도 쓰지 않은 채 영정을 들고 있는 고향 후배 오현규는 2006년 부산 해운대구에서 한나라당 소속으로 구의원에 당선된다.

당황한 경찰은 증거인멸을 위해 화장을 시도하지만, 사건을 담당한 부장검사 최환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차리고 사체보존을 명령하고 부검을 지시한다. 부검 결과 박종철의 시신 곳곳에 남아있는 구타의 흔적과 부풀어오른 복부 등은 잔혹한 고문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한 때 박종철의 죽음을 밝히는 데 검사시절 안상수가 활약했다고도 하나, 유가족이나 주변 지인들은 안상수가 아닌 부장검사 최환의 역할이 컸다고 증언한다. 남영동 대공분실을 찾은 안상수 현 창원시장. ⓒ연합뉴스

한 때 박종철의 죽음을 밝히는 데 검사시절 안상수가 활약했다고도 하나, 유가족이나 주변 지인들은 안상수가 아닌 부장검사 최환의 역할이 컸다고 증언한다. 남영동 대공분실을 찾은 안상수 현 창원시장. ⓒ연합뉴스

경찰은 사건을 축소하기 위해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희대의 개드립을 날리지만, 이를 곧이 곧대로 믿는 이는 많지 않았다. 양심적인 부검의들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폭로로 박종철의 죽음이 '고문치사사건'임이 드러나게 되고, 이는 6월 민주항쟁-직선제 개헌 투쟁의 도화선이 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박종철이 죽음으로 지키고자 했던 선배 박종운은 이후 돌연 한나라당의 공천을 받아 부천 오정구에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한다. 당시 한나라당의 핵심에는 군사정권 하에서 고문검사로 악명을 떨쳤던 '정형근'이 그를 반갑게 맞이하고 있었다.

사람일은 모르는 거라는 옛말에 새삼 떠오르는 사진이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는 옛말이 새삼 떠오르는 사진이다.

당시 박종운은 어떻게 후배를 죽음으로 몰고 간 이들이 있는 정당으로 갈 수 있느냐는 질문에 '박종철 열사의 정신을 가슴에 묻고 정치하겠다.'고 답했다. 하지만 먼 훗날 박종철을 다시 만났을 때, 자신을 죽음으로 지켰던 후배의 앞에서도 그 이야기를 당당하게 할 수 있을까.

Tweet about this on TwitterShare on FacebookShare on Google+Pin on PinterestShare on TumblrEmail this to someone
The following two tabs change content below.
박준성

박준성

Twenties TimeLine 피처 에디터. 흑석동을 좋아하는 밥버러지 백수
박준성

박준성의 이름으로 나온 최근 기사 (모두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