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FF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온 영화들

부산국제영화제는 언제나 화제작을 미리 만나는 자리였다.

매년 가을, 많은 사람들에게 손짓을 보내는 부산국제영화제가 올해로 열 아홉살이 되었다. 영화제가 끝난 지 한 달이 넘었지만 극장가는 이미 영화제의 여파가 여전하다.

처음으로 신설된 ‘올해의 배우상’ 그리고 시민평론가 상을 받은 김태용 감독의 <거인>이 개봉하였다. 정치적인 논란을 이유로 상영되지 못할 뻔한 이상호 기자의 <다이빙벨>도 빼놓을 수 없다. 그 뿐인가. 김훈 작가의 소설이 영화화된 임권택의 102번째 작품 <화장>도 공개되었고, 12년 동안 같은 배우를 촬영한 독특한 형식 때문에 평론가들의 포형을 독차지하고 잇는 <보이후드>까지, 모두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먼저 만날 수 있었던 작품들이다.

감독과 배우들이 확 트인 바닷가에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그 곳, 부산국제영화제만큼은 파격 드레스로 검색어 순위에 오르려고 화장을 두껍게 칠한 여배우를 주목하지 않아도 좋다. 민낯의 신인 감독들에게 시선을 돌리느라 바쁠테니 말이다. 8mm 카메라를 들고 다니던 영화 지망생들의 꿈이 펼쳐질 내년은 또 어떤 작품으로 우리에게 다가올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그 기다림을 달래기 위해 아래의 영화라도 보고 있어 보자.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서 선보인 역대 작품들을 소개한다.

 

1회(1996). <세 친구> 임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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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사당과 청와대가 있던 서울은 예술을 논하기엔 너무 소란스러웠다.아시아 최고의 영화제를 만들자고 결의한 30대 후반의 영화인들은 부산에서 첫 테이프를 끊었다. 당시 영화제의 중심은 남포동이었다. 모든 술집이 문을 닫은 12시 이후, 평론가들과 외국에서 온 손님들이 모여 진짜 술판을 벌였다는 전설은 아직도 전해지고 있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린 1996년은 여러모로 한국영화에 의미가 있는 순간이었다. 삶의 모든 것에 심드렁한 홍상수 감독과, 삶을 향해 죽을 듯이 덤벼드는 김기덕이 동시에 극장에 자신의 첫 영화를 올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뉴 커런츠’ 부문 후보 중에는 최근 개봉한 <제보자>를 연출한 임순례 감독의 데뷔작 <세 친구>도 있었다.

누군가에게 임순례 감독에 대해 묻는다면 영화 <남쪽으로 튀어>를 연출하다 제작진과의 갈등으로 촬영을 중단한 감독, 혹은 동물보호시민단체 카라의 대표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시 평론가들은 <세 친구>로 등장한 임순례 감독에게 “특별히 가진 것 없고, 특별히 배운 것 없으며, 특별히 잘난 것 없는 주변부 삶에 대한 애착과 관심”이라는 호평과 함께 한국 영화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감독으로 꼽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영화는 그 흔한 로맨스 라인 하나 없다. 최근 사회 참여 영화들과 다르게 얼굴 클로즈업도 없다. 거기다가 유명한 배우들도 아닌 세 명의 젊은이가 등장하는 이 영화는 우리에게 그저 낯설기만 하다. 하지만 사회 안에서 이루고 싶은 꿈이 있지만 집 안에서 눈치 보기에 바빠서 ‘아프니까 청춘이다’ 라는 말이 허용되지 않는 나이의 이들은 지금의 우리 주변 모습과 참 닮아있다. 그렇게 1996년의 스무 살 청년들의 모습을 담담하게 보여준 <세 친구>는 이후 15개가 넘는 해외 영화제로 진출하였고, 아시아 최대 영화제의 첫 얼굴 마담이 되었다.

세 명의 스무 살이 등장하는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는 신체검사 통지서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뭐라도 될 줄 알았던 이들 앞에 군대라는 폭력이 주는 그 느낌을 영화는 생생하게 전달한다. 그건 임순례 감독이 성별을 넘나드는, 주류보다 비주류에 관심을 기울이는 노력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C급 뮤지션들의 애환을 담은 <와이키키 브라더스>와 비주류 스포츠인 핸드볼 선수단이 은메달을 따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까지 어김없이 이어진다.

최근 개봉한 <제보자> 역시 실화였던 줄기 세포 조작 사건을 ‘관찰자의 시선으로 보는 영화다. 개봉 당시 감독은 <제보자>에 대하여 “이 영화는 진실을 수호하는 분들에 대한 헌사”라고 말한 바 있다. 개인에서 사회로 폭이 넓어졌을 뿐, '임순례' 라는 프레임을 통해 우리가 처음 경험했던 그 초점은 조금도 흐려지지 않았다.

 

5회(2000).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류승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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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을 뒤로 하고 20세기가 무리 없이 지나갔다. 이제 5살이 되어 말문이 트기 시작한 부산국제영화제의 양과 질도 더욱 커졌다. 최근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로 아버지들의 가슴을 울린 고로에다 히로카즈 감독, 중국의 떠오르는 거장 지어장커 감독도 이곳을 거쳐 갔다. 3회부터 시작된 PPP(부산 프로모션 프로젝트)의 결과로 제작된 영화들이 베니스 영화제에서 최고 권위의 황금사자상을 타면서 금의환향하던 시기였다.

많은 바이어들이 한국영화를 해외 배급하기 위해 모이는 ‘한국영화 필름마켓’도 처음으로 시작되어 큰 호응을 얻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주목한 한국영화의 극장가에는 조금 특별한 작품이 걸렸다. 손익분기점의 기준이 되는 관객 수는 고작 만 명의 저예산 영화. 하지만 4개관에서 시작된 이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은 놀랍도록 열광적이었고, 총 8만 명의 사람들이 찾은 성과를 보인 이 영화의 이름은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이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관객점유율은 평일에는 60%. 주말에 90%를 기록할 정도였다. 참고로 최근 화제가 된 영화 <비긴어게인>이 9위에서 2위까지 올라오는 폭발적인 상승세를 보일 때의 점유율도 46%에 불가한 것을 감안한다면 놀라운 일이다. 그 해 독자들이 뽑은 올해의 한국 영화에서는 <JSA 공동경비구역>, <박하사탕>에 이은 3위. 그야말로 한국 영화 최고 사건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었다,

<세 친구>가 먼 시점에서 내부에서 허물어지는 청춘을 관찰했다면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카메라는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는 싸움의 현장을 벗어나지 않는다. 공고생 석환(류승완)과 성빈(박성빈)이 당구장에서 ‘공돌이’라 놀리는 예고생들의 말에 발끈하는 갈등을 다룬 1부 ‘패싸움’부터, 석환의 동생 상환(류승범)이 형의 친구 성빈을 통해 몸 하나로 때우는 폭력세계에 매력을 느껴 거기에 투신하는 4부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까지, 총 4개의 단편을 하나로 묶었다.다중으로 이어지는 폭력의 이야기는 흑백의 16mm 필름 속에서 형의 일대일 대결과, 동생 무리의 패싸움을 번갈아 보여주면서 끝이 난다.

그리고 류승완 감독은 이때부터 ‘액션키즈’라는 별명을 꼬리표처럼 달게 된다. 하지만 이미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키즈'로 취급하기에는 아쉬울 만큼 이야기의 힘이 강했다.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알아”라는 <부당거래>의 대사가 맛깔 나게 전해지기 전부터, “돈 있는 새끼들은 돈 믿고 까불고, 가난한 새끼들은 깡다구 믿고 까분다”라고 말하기 전 부터 이미 마스터의 ‘싹수’가 보인 것이다.

이후 <아라한 장풍 대작전>, <주먹이 운다>로 해외 영화제의 문을 두드린 류승완 감독의 가능성은 최근 <부당거래>과 <베를린> 연이은 호평과 흥행으로 가속도가 붙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항상 동생 류승범이 있다. 이목구비가 뚜렷하지도 않고, 유행하는 훈남의 얼굴도 아니지만 분명히, 대체할 수 없는 류승완 작품세계의 거울과도 같다. 가진 콧대 만큼이나 선이 굵은 연기를 했던 하정우, 한석규, 전지현과는 달리 5:5 가르마를 휘날리는 류승범의 얼굴에는 어디로 엇나갈지 모르는 긴장감이 있었다. 지금도 어디를 가든 이 형제의 영화는 언제나 우리에게 기대를 부른다.

 

10회(2005). <용서받지 못한 자> 윤종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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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주년을 맞은 부산국제영화제는 점점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상영관을 두 배로 늘리고 영화계 거장이 관객들과 만나 이야기하는 ‘마스터클라스’, 영화가 끝난 뒤 이어지는 ‘관객과의 대화(GV)’의 비중이 대폭 늘었다. 어릴 적 옷이 맞지 않는 것 처럼, 그간 부산국제영화제를 품어왔던 남포동은 점점 몰려든 사람들을 맞이하기에는 너무 좁아졌다. 지난 행사와는 달리 유난히 영사 사고나 상영 취소 등의 사건도 많았다.하지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한 독립영화가 부산으로 찾아온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철없는 소년이 철 든 어른이 되어 돌아온다고 전해지는 군대. 이것을 주제로 한 장편영화는 쉽게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맛이 있었다. ‘올해의 독립영화’로도 손꼽힌 <용서받지 못한 자>는 국제영화평론가협회상 등 4관왕을 수상하였고, 독립영화계의 성지 선댄스 영화제부터 칸 영화제까지 세계를 순회했다. 중앙대학교 영화과 졸업 작품으로 시작된 이 영화는 각종 영화 시상식들에서 그 해의 신인 감독·배우상을 휩쓸게 된다.

사회에 대해 자신이 느꼈던 모순들이 군대를 갔다 오면서 이해가 되었다는 감독은 국방부에 가짜 시나리오를 제출하면서까지 영화를 촬영하였다. 이것 때문에 육군 본부에서는 개봉하기 이틀 전에 감독을 고소하기도 했다. 영화를 둘러싼 소동은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있었다. <용서받지 못한 자>의 마지막 상영이자 GV가 있었던 날 극장에서는 영사 사고가 나서 영화가 도중에 끊겼다. 영화를 둘러싼 다양한 반응 때문에 가뜩이나 마음 고생을 한 감독은 GV에 참여하지 말까 고민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GV에서 자신이 모습을 드러내자 열광과 함께 칭찬을 건네던 관객들을 만난 순간이 영화 인생에서 가장 황홀한 순간이었다고 한다.

평론의 극찬도 뒤따랐다. 정성일 영화평론가는 이 군대 이야기를 만든 감독을 두고 우리 시대의 가능성이라고 명명했다. 칸 영화제 이후에 <뉴욕타임스>의 한 영화 기자는 군대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한국 남성의 모습을 수척한 몸으로 폐허가 된 고향을 걷던 영화 <피아니스트>의 주인공과 비교하기도 하였다. 외국 영화 속에서 총알과 아우성이 오가는 전쟁 속에서 볼 수 있었던 나약한 인간의 모습은, 사실 깔깔이를 입고 군화를 벗어 던지는 조용한 내무반에서도 존재했던 것이다.

<용서받지 못한 자>를 통해 주목받은 배우 하정우의 이후 행보도 순탄했다. <비스티 보이즈>에 이어 개봉한 2008년에 <추격자>의 희대의 살인마 지강민을 통해 완전히 배우로 자립하였다. 그리고 윤종빈 감독은 하정우와 함께 영광의 장소 부산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그 결과 가장 남자들이 많이 따라한 대사, “살아있네!”가 생겨나게 된다.

<범죄와의 전쟁:나쁜놈들 전성시대>는 부산을 무대로 속에서 살아남은 오늘날 ‘꼰대’들이 마블의 영화 속 캐릭터처럼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던 영화였다. 그리고 이 둘이 처음으로 뭉쳤던 2005년의 부산 역시 부산국제영화제의 영광을 이야기할 때 항상 언급되고 있다.

 

15회(2010). <파수꾼> 윤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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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회 부산국제영화제가 스스로 내건 슬로건은 ‘부산국제영화제의 새로운 도약’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수많은 해외 영화제를 오가며 인맥을 쌓고 15년 동안 영화제의 내실과 양을 키운 김동호 영화제 집행위원장이 마지막으로 지킨 영화제이기도 했다. 작품 수는 예년에 비해 줄어들었지만 영화제는 오히려 찾아온 사람들로 붐볐다.

어느덧 부산국제영화제는 한 해 화제가 되었던 한국영화의 감독과 배우를 만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화제작은 자연스럽게 개봉으로 이어지는, 그렇기에 화제작을 먼저 발빠르게 찾아보고 미리 볼 수 있는 곳이었다. 특히 2010년의 영화제는 2011년 영화판을 위한 예고편이었다. 와이드 앵글 부문에서 소개된 한혜진, 안재훈 감독의 <소중한 날의 꿈>은 기획부터 개봉까지 11년이 걸린 손때 묻은 애니메이션이었다. 그리고 다음 해 <소중한 날의 꿈>은 국산 만화로 가장 많은 관객이 찾은 <마당을 나온 암탉>, 굵은 선으로 아무 희망도 없는 세 친구의 학창시절을 표현한 <돼지의 왕>과 함께 극장에 걸렸다.

독립영화 역시 마찬가지이다. 2011년에 개봉한 <혜화,동>, <두만강>, <무산일기> 모두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독립영화의 저변 확대를 기대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3편의 영화 모두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 대표작들이라는 점도 이목을 끈다. 하지만 15회를 맞은 영화제 대표하는 영화는 따로 있었다. <무산일기>와 함께 뉴커런츠 상을 받은 <파수꾼>은 그야말로 ‘새로운 이야기꾼’이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예술영화의 1만관객은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성공을 넘어 대박의 수치였다. 그런데 파수꾼은 2만명 이상의 흥행 성적을 거두었다. 당시 상영관 수가 고작 21관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더 놀라운 수치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정작 이 영화의 GV 현장은 무척 차가웠다고 한다. 기립박수는 커녕 다들 무표정한 덕분에 조용한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아마도 영화의 여운이 그만큼 길어서가 아니었을까. 세 남자 고등학생의 우정이 깨진 거울처럼 조각나고 서로 화해하지 못하는 모습은 마지막에 흐르는 가수 진보의 노래처럼 먹먹하기만 하다. 그렇게 영화는 기태의 자살 이후로 그의 아버지가 기태의 주변 사람들과 만나서 왜 죽었는지를 묻는 기본 흐름에서 점점 휘몰아치기 시작한다.

청소년 3명이 나오지만 힘이 들 때는 하늘을 보라면서 깔깔하고 웃는 일반적인 성장담과는 거리가 멀다. 인터뷰에서 감독은 ‘긍정의 성장이 아닌 부정의 성장’을 다루고 싶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그의 영화 속에서 일진은 모든 애들을 거느리고 착하고 안경 쓴 범생을 괴롭히지도 않고, 안경만 벗으면 순정만화 여주인공 외모가 되는 생머리 여자애를 위해 자기 몸을 바치지도 않는다. 그야말로 자기 살기에도, 그 자리에서 버티기에도 바쁜 불안한 소년이 영화가 바라본 진짜 일진의 모습이다.

사람들이 영화를 본 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이유는, 봉준호 감독의 말 처럼 이 사건을 보고도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역겨운 사람 중에 하나라고 느껴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 영화의 심사위원이었던 배우 김윤진은 “스토리텔링과 뛰어난 연기력이 잘 조화된 이 영화는 감독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평론가들 역시 감독을 두고는 “스토리텔링의 방식을 알고 배우를 다룰 줄 아는, 제대로 준비된 신인”라고 극찬한 바 있다.

그래서 기태를 연기한 배우 이제훈은 자신을 피하는 희준(박정민) 앞에서는 화해하려고 애써 웃다가 미간을 찌푸리고 덥석 화를 내야 했고, 집으로 찾아간 동윤(서준영)에게는 비수에 꽂히는 말을 듣고 당황해서 말을 더듬어야 했다. 얼굴 근육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은 그 미세한 표현을 훌륭하게 소화한 이제훈은 영화와 함께 가장 큰 주목은 받는 신인 남자배우가 되었다. 그리고 <건축학개론>에서는 납득이에게 키스 강습을 받는 국민 첫사랑 남으로 주목받는다.

세 명의 친구 중에 나머지 둘도 영화나 드라마에 활발하게 얼굴을 비치고 있다. 친구 둘 사이를 중재하는 동윤 역할을 맡았던 서준영은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를 거쳐 현재 이제훈과 함께 드라마 <비밀의 문>에 출연하고 있다. 기태에게 맞고 다니는 희준 역할의 박정민은 영화 <댄싱퀸>의 짜장면 배달원, <전설의 주먹>의 어린 황정민 등으로 꾸준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010년에 우리에게 다가온 <파수꾼>은 아시아, 그리고 한국 신인 감독의 좋은 작품을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부산국제영화제의 원래 역할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남아있다.

 

18회(2013). <한공주> 이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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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제는 몸집을 더욱 불려갔다. 2011년에는 부산국제영화제를 대표하는 전용관 ‘영화의 전당’을 지어서 개막식과 폐막식을 진행하였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부산시네필상, 시민평론가상 등 일반 시민들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할 수 있는 수상부문도 만들어졌다. 저예산영화의 배급을 더 활발히 진행하기 위하여 CGV와 손을 잡고 무비꼴라쥬상을 신설한 것도 같은 시기이다.영화제의 명칭 역시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PIFF에서 BIFF로 바뀌었다. 그리고 영화제에서는 대중적으로도 익숙한 감독들이 자리를 빛냈다. 최근 102번째 작품 <화장>을 영화제에서 공개한 임권택 감독의 작품들 중 70여개를 상영하는 회고전이 18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열렸다. <설국열차>의 봉준호 감독과 <펄프 픽션>의 쿠엔틴 타란티노가 즉석 만남으로 함께 관객들과 수다를 떠는 시간을 가지기도 하였다.

이 때 상영된 독립영화을 살펴보자. 삼성 반도체 노동자 사건을 다룬 작품이자 전 제작비를 시민들의 돈으로 마련한 <또 하나의 약속>, 그리고 여기서 <족구왕>은 다음 해 이례적으로 4만 관객이 넘는 흥행 성적을 거두는 화제작이 된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해 가장 사람들을 사로잡은 작품은 <한공주>였다. 시민평론가상과 CGV 무비꼴라쥬상을 모두 받은 이 작품은 해외 영화제에서도 수상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영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2004년 즈음 밀양에서 한 명의 여학생이 다수의 남학생들에게 집단적으로 성폭행을 당한 사건이 일어난다. 왜 이런 이야기를 꺼내야했는 질문이 목 끝까지 차오르는 가운데, <한공주>의 주인공 ‘한공주’는 영화의 중간 이상을 심드렁한 무표정으로 버틴다. 앞서 소개한 <파수꾼>과 마찬가지로, 스크린 안에서 한 개인이 무너지는 동안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이 관객에게 퍼진다. 로테르담 영화제에서 감독이 밝힌 대상 수상처럼 '이야기를 퍼즐처럼 이어가는 방식’은 영화 속에서 사건 이전이나 현장이 아니라 사건 이후 피해자가 다른 공간에서 적응하려고 애쓰는 과정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

시상식 현장에서 ‘전도연, 문소리를 잇는 여배우’라는 말을 들은 배우 천우희는 우리에게 크게 낯설지 않다. 동갑내기들이 칠공주가 되어서 만든 우정이 어른이 되어서도 이어지는 <써니>에서 천우희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자신보다 약한 심은경에게 버럭 화를 내가다고, 몇 년 뒤 “저는 잘못한 거 없는데요”라고 읊조리는 독백을 뱉는 모습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최근 개봉한 <카트>에서는 마트 노동자들 사이에 있는 막내로 등장하였고, <추격자>, <황해>의 나홍진 감독의 세 번째 영화 <곡성>에서 황정민, 곽도원과 함께하는 유일한 홍일점 여배우로 출연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부산국제영화제는 실력있는 20대 여자배우에 굶주려있던 영화계에 매번 좋은 배우들을 소개시켜주는 인큐베이터의 위치까지 담당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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