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의 탄생] 8화: 남들은 가벼운 만남이라고 하지만… 마음이 가 있더라고

어플리케이션으로 만나고 헤어졌지만, 거기에도 마음은 있었다

서로의 얼굴도 모르는 두 남녀는 PC통신 속에서 대화를 시작한다.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음악을 매개로 시작된 대화는 서로의 상처를 나누는 것으로 옮겨가고, 얼굴을 마주하진 않은 서로는 진실한 마음을 나누며 인연을 엮어간다. 1997년 개봉한 영화 ‘접속’의 내용이다.

1997년과 달리, 온라인을 통한 만남은 더 이상 우리에게 먼 얘기가 아니다. 손 위의 스마트 폰에서, 소개팅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언제 어디서나 새로운 누군가와의 만남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PC통신, 더 거슬러 올라가면 펜팔에서 시작되는 저 너머의 만남.

하지만 그런 만남을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불편하기만 하다.

인터뷰이 소개

정훈(가명). 25세. 현재 서울 모 대학 경영학과 재학 중.
소개팅 앱에서 만난 2살 연하 여자친구와 2년간 연애 후 이별.

 

만남 앱에서 만났다고?

응, 정확히는 소개팅 주선 앱. 하루 한 명씩 서로 프로필을 받는 식으로 진행되고.

 

그건 어떻게 진행되는 거야?

사진이랑 나이랑 지역, 학교나 취미생활 같은 간단한 프로필 보고 맘에 들면 수락 누르면 돼. 그 쪽에서도 수락 누르면 그때 서로 휴대폰 번호 공개해주는 식이야. 그때부터 그냥 연락하는 거지.

 

소개팅 앱은 더 이상 낯선 만남 방식이 아니다.

 

그 앱은 어쩌다 시작하게 된 거야?

그냥, 외로워서. 군대 전역하고 바로 복학하니까 적응도 잘 안되고 그랬어. 아는 사람도 많이 없고. 내가 1학년 1학기 마치고 바로 군대 갔잖아.

남자 동기들은 이제 다들 군 생활 하고 있고, 여자 동기들은 다들 휴학하고. 후배들은 당연 얼굴도 못 보고 갔으니 거의 남이지. 그렇게 혼자 수업 듣고 혼자 밥 먹고 하다 보니까 사람이 만나고 싶더라고.

 

다르게 사람을 만날 수도 있잖아. 동아리 가입, 고등학교 친구..

내가 고향이 지방이잖아. 그래서 다 흩어져서 많이 봐야 세 달에 한번이고, 그때 다들 군대에 있을 시기여서 보기 힘들지.

동아리 가입은, 음. 생각 안 해본 거 아닌데, 관심 가는 곳도 딱히 없고 무엇보다 복학생이라고 잘 받아주질 않더라. 물론 지금에야 과에 아는 후배도 좀 늘고 친구들도 많이 돌아왔지.

근데 그때는 진짜 만날 사람이 아무도 없더라고.

 

근데 그런 앱은 좀 그렇지 않나?

뭐가?

 

좀 아무래도..조건부터 본다던가, 무엇보다 신원도 불확실하고.

뭐 그럼 오프(라인)에서는 조건 안 보는 사람들만 있나? 거기다 나이 먹으면 그땐 더 따지잖아.

신원 같은 거라면 뭐, 학교 같은 거? 물론 속이는 사람 있을 수도 있지. 근데 어차피 사람 만나는 거 다 똑같아. 그냥 믿고 만나는 거지.

사실 어떻게 아는 사람 소개로 소개팅도 했었다? 근데 좀 예의가 많이 없더라고. 맘에 안 들어도 최소한의 예의는 갖춰야 하는데, 내내 뚱한 표정으로 사람 무안하게 단답만 하더라고..

재밌게 못 해준 내 잘못이라고 하면 할 말 없지만. 괜히 소개해준 사람이랑 사이만 어색해졌지.

 

서로를 알 수 있는 정보들

하긴. 나도 주선자랑 어색해질까 걱정돼서 소개팅 못하겠더라.

만약 잘 안되면 괜히 얼굴 보기 껄끄러워지니까. 그리고 보통은 잘 안될 때가 더 많잖아. 또 잘 돼도 문제가 있는 게, 아는 동생이 그러더라. 소개팅으로 잘 됐는데 여자친구랑 싸우면 아직도 주선자 친구한테 연락 온다고. 무슨 시어머니도 아니고.

그리고 요즘은 소개팅 시켜주려는 애들도 별로 없어. 잘 안되면 괜히 자기가 욕먹을 거 아니까 정말 친한 사람 아니면 웬만해선 다들 소개해 줄 사람 없다고 그래.

 

“다들 서로 바쁜데
남 일에 신경 쓸 시간도 별로 없고.”

 

그 앱 쓰고서 얼마 만에 만난 거야?

한달 좀 안 돼서? 그 중에 실제로 만남까지 이어진 경우는2번.

처음 만난 애는 크게 별 생각 없이 만났는데, 대화 주제나 그런 게 잘 안 통해서 한번 보고 말았어. 그리고 두 번째 만난 애랑은 사귀게 되었고..

 

만나고 바로 사귀었어?

에이 무슨, 몇 번 더 만났지. 그러다가 서로 마음에 드니까 고백도 하고 사귀기 시작한 건데.

 

어디가 마음에 들었기에!

웃는 게 참 예뻤어. 그리고 무엇보다, 서로 얘기가 끊긴 적이 없었어. 나나 걔나 여행 다니는 거 좋아했는데, 여기저기 다녀온 곳들 얘기하고, 또 어디 갈지 그런 계획 얘기도 하고..

처음 만난 건 신촌의 어느 카페였는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까 밤에 맥주까지 하고선 헤어졌어. 나갈 때는 길어야 저녁이겠지 생각했는데.

누구랑 그렇게 길게 웃으면서 얘기했던 게 진짜 오랜만이었던 것 같아. 계속 이런저런 말들이 절로 나오더라고. 사실 가는 순간에도 좀 아쉬웠는데. 나한테 그러더라고, 지겹지가 않았다고.

 

그거 시끄럽다고 돌려 말한 거 아니야?

그럴 수도 있겠다(웃음). 또 음..내가 덩치가 좀 있어서 듬직해 보여 좋았대. 마른 남자는 자기 타입 아니라고, 푸근해 보이는 사람이 좋다고 하더라.

 

고백은 어떻게 한 거야?

한 5번쯤 만났을 때였나. 그날도 같이 술 한잔 하고 있는데 나한테 대뜸 “우리 무슨 사이냐”고 묻더라고.

사실 3번쯤 만났을 때부터 손도 자연스럽게 잡고 그랬거든. 그러니 여기서 얼렁뚱땅 말하면 안될 것 같아서, 한참 말 고르다가 나온 말이 나 너 진지하게 만나고 있는 거라고. 딱 그 한마디 했어. 그때부터 이제 1일 시작.

 

만남이 시작되는 순간

주변에서 앱에서 만났다고 하면, 좀 아무래도 좋지 않게 보지 않으려나.

응. 그래서 주변에는 친구가 소개해줬다고 했어. 그런 시선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까지 욕먹는 것도 싫고. 너도 그런 데서 만나면 좀 그렇지 않냐고 그랬잖아?

사실 처음엔 정말 친한 고등학교 친구들 한두 명한테만 얘기했었어. 그런데 다들 왜 그런 데서 만나냐고 하더라.

솔직히 말하면 나도 처음엔 진지하게 만날 거란 생각 못했어. 그냥 적적하고, 사람이 만나고 싶어서, 진짜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 같아서 시작하기도 했고. 그러다 한 번 두 번 만나고 얘기하고 그랬어.

 

 

“그러다 보니 어느 새 마음이 가 있더라고.”

 

남들은 좀 가벼운 만남이라고 생각하니까.

아무래도 중간에 보증하는 사람도 없고, 실제로 알던 사이도 아니니까. 솔직히 주변에 마음에 드는 사람 있으면 그 사람 만나려고 했겠지.

근데 그랬다가 과나 동아리 CC 깨지면 어떻게 되는지 알잖아. 둘 중 하나는 활동 그만두고 나가고 심하면 아예 반으로 쪼개지기도 하고. 또 무슨 일만 있으면 소문은 참 빠르더라?

사실 입대 전에 동아리 하나 했었거든. 큰 동아리도 아닌데, 거기서 CC를 했다가 헤어졌어. 서로 안 맞아서 자연스럽게 헤어진 건데, 자리만 가면 온통 그 얘기만 하더라.

무슨 악의가 있어서 그러는 거 아닌 건 아는데, 진짜 불편하더라. 걔 얼굴 보기도 민망해서 못 나가. 그 뒤로도 마찬가지야. 이미 좋아해버린 사람이면 모를까, 그룹 내에서는 안 만나.

 

만나서는 주로 뭐했어?

뭐하기는. 그냥 맛있는 거 먹고 가끔 영화도 보고 카페에서 수다도 떨고. 둘 다 놀러 다니는 거 좋아해서 가끔 춘천이나 가평, 파주 같은 데로 당일치기 여행도 다녔어. 커플 하는 일이 뭐 특별한 게 있나.

 

그러네, 얼마나 만났다고?

군대 전역하고 얼마 후니까, 2년 좀 넘게 만났지.

 

2년이면 그래도 꽤 오래 사귀었네.

응. 내가 만난 사람 중에는 그래도 제일 오래 만났어.

당연히 매 순간 새롭고 그런 건 아니었고 권태기도 몇 번 있었지. 그래도 워낙 괜찮은 애라 처음 좋았던 감정이 꽤 무던하게 오래 갔던 것 같아.

그리고 같이 다닌 데가 참 많았어. 커피값보단 교통비가 많이 들었을 걸? 아직 남아있는 추억도 많고. 큰 싸움도 없이 항상 즐겁게 연애했던 것 같아.

 

그런데 어쩌다가….

헤어지기 한 달쯤 전인가? 소개팅 앱으로 만났다는 게 어쩌다가 새로 들어간 동아리 안에 소문이 났어.

그리곤 나더러 만날 데가 없어서 그런 데서 만나냐고 하데? 몇몇은 그저 장난으로만 놀리고 그랬는데, 몇몇은 나를 좀 이상한 취급 하면서 피하더라. 처음엔 그게 뭐 어때서 그러냐고 대꾸도 하고 그랬는데, 아무도 달라지지 않았어.

그러다가 새로 들어간 동아리도 결국 나오고, 그렇게 받은 스트레스를 알게 모르게 그 친구한테 보인 것 같아. 괜히 짜증이 나더라.

"차라리 솔직하게
징징대기라도 했으면
좋았을 걸."

그렇게 맨날 티격태격하다 하루는 나한테, 요새 왜 그러냐고 묻더라고.

적당히 둘러댈 걸 어쩌다가 다 말해버렸어. 너 앱에서 만났다는 얘기 때문에 이렇게 됐다. 그래서 너만 보면 괜히 막 그런다. 나도 왜 그런지 모르겠다 등등.

다 듣더니 딱 한마디 하더라고. “알았어, 그럼 우리 더 이상 같이 하기는 힘들 것 같네” 하고.

 

끝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그래서? 잡지는 않았어?

막 쏘아대다가 그 말 들으니까 그냥 멍했어.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모르겠더라. 그냥 “어? 어…”하고 넋 놓고 있으려니까 잘 있으라고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라고.

그게 내가 본 마지막이었어. 그냥 순간 멍했는데, 뭔가 꿈 같았어. 걸어나가는 발소리도 그랬고.

지금은 뭐, 이제 와서 잡기에는..너무 멀리 왔지. 내가 병신 같았고. 이제 그 순간 줬던 상처들을 덮을 만큼 잘해줄 자신도 없어.

 

뭔가 허무하다

막상 시작의 형식에 신경을 쓴 건 나였나 봐. 앱에서 만났든 뭐가 됐든, 그게 뭐라고 사람에 대한 판단기준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걸 현명하게 넘기지 못한 나도 바보 같고.

 

후회는 남지 않아?

많이 남지. 그냥 그 때 미안하다고 바로 붙잡을 걸, 그런 것들. 정말 좋은 애였고 놓치기 아까운 애였으니까. 근데 그 애를 만났던 일은 후회하지 않아.

 

“만나는 동안 행복했어. 너무…”

 

이들의 만남은 “왜 그런 데서 만나”라는 한 마디로 평가절하 당했다.

그 안에 존재하는 많은 맥락은 아무도 보지 않고 그저 가벼운 것으로만 취급 당했다. 서로에게 진심을 다했던 2년이란 시간은 손가락질하는 이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은 서로 진지하게 상대를 만났고, 함께 많은 것들을 나누며 추억을 쌓았다. 그런 그들의 사이에 다리를 놓은 것이 ‘앱’이었을 뿐.

함께 아는 사람이 없었기에 그들은 더욱 서로에게 솔직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위해 체면을 차리고, 애써 자신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

그런 사랑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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