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도 모르는 내 아비와의 기억은 내가 중학생일 때까지였다. 내가 열 살 때 우리 집은 네 평 남짓한 단칸방 월셋집에서 살았고 그때 아비의 수입은 150만 원이었다. 노란 봉투에 손 글씨로 적힌 150만 원이라는 글자가 아직도 또렷이 기억난다. 아비는 내가 중학교 때 엄마와 이혼하고 집을 나갔다.
아비는 도박에 빠져 살았다. 벌어오는 돈 이상을 도박에 탕진했다. 집이 제대로 굴러갈 리 없었다. 우리 집은 가뜩이나 적은 수입에도 불구하고 아비의 낭비 때문에 가난에 허덕여 살았다. 아비가 떠나고 나는 의료보험이 아닌 의료보호대상자로 분류되었다. 한 달에 만 원이 채 되지 않는 의료보험료를 냈다. 그전보다 약값도 더 싸졌다. 나는 당시에는 그리 보편적이지 않았던 기초생활수급자였다. 정부는 우리 집에 한 달에 30만 원을 보태줬다. 부족했지만 요긴했던 이 돈은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끊겼다.
학창시절, 공부를 못하진 않았다. 1등을 도맡아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상위권 성적은 받을 수 있었다. 학원을 제대로 가지 못했다는 변명은 별로 내키지 않았다. 불만을 가져봐야 내게 이득 되는 건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다. 그냥 불만 갖지 말고 주어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될 줄 알았다.
나는 아비보다는 잘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비처럼 도박에 손 댄 적도 없었고 평균 이상으로 공부를 잘했으며 죽을 만큼 열심히 산 것도 아니지만 딱히 불성실하지도 않았다. 일 처리도 잘 하는 편이었고 머리도 잘 돌아가는 편이었다. 나는 내가 월등히 뛰어나다고 자만해 본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평균보다는 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먹고사는 걱정을 할 리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 아비가 살아온 세상, 내가 어렸을 때 본 그 세상을 기준으로는 그랬다.
내 아비가 나를 낳았을 무렵의 나이가 된 나는 가정을 꾸리기는커녕 취업조차 되지 않았다. 삶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숱하게 했다. 눈높이를 낮추라기에 한없이 낮춰 작은 회사에 취직했다. 그때 내가 받은 돈은 100만 원. 나는 아비보다 열심히 일했다. 하루에 열여섯 시간을 사무실에서 보냈다. 그리고 내가 회사에서 받은 월급은 내 아비가 20년 전 받았던 월급 봉투보다 얇았다.
내 아비가 지금 내 나이보다 조금 더 많았을 때 우리 집은 1,600만 원을 내고 방이 세 칸 있는 전셋집으로 이사했다. 그때의 아비만큼 벌고 있는 나는 서울에서 제일 싼 동네에서 한 시간이 넘는 거리를 통근하며 월세방에 살고 있다. 내가 주거에 갖는 미련은 내 집 마련도, 전셋집 마련도 아닌 그냥 조금 더 넓고 깨끗한 두 칸짜리 방을 갖는 것이다.
조선일보 칼럼을 보고 억울해서 눈물이 났다. 그는 우리가 열심히 살지 않고 불만만 갖는다며 조롱했다. 나는 그들의 삶을 기록으로 배웠다. 과외 몇 달 하면 어렵지 않게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 수 있었던 그때를, 대학만 졸업하면 스펙이야 어떻든 어느 대기업이고 취업할 수 있었던 그때를, 하물며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입에 풀칠할 걱정은 없었던 그때를.
가난했겠지만, 그래도 열심히 하면 뭔가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이라도 갖고 있었던. 그리고 조금 열심히 하면 뭔가를 손에 잡는 사람이 태반이었던 그 황금 같은 시기를 살았던 사람들이 쉽게 내뱉는다. 너희는 열심히 살지 않았다고. 그게 너희들의 죄라고. 하지만 우리가 늙은 건 죄가 아니라고.
당신이 황금 같은 세대를 산 것이 죄가 아니듯이 우리도 죄를 지어서 지금 세대를 사는 건 아니다. 우린 성공하기 위해 열심히 사는 게 아니라 낙오하지 않기 위해 열심히 산다. 물론 그래도 낙오한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한국은 OECD 국가 중 자살률이 압도적으로 높다.
아비처럼 살지 않기 위해 아비보다 열심히 배우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나는 그때의 아비와 비슷한 월급을 받고 있다. 그런데 쌀값은 그때보다 몇 배나 올랐고 머리 누일 방 한 칸 구하기는 그보다도 몇 배는 더 힘들다. 나와 내 친구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도 모를 그깟 임금피크제 갖고 양보 한 번 한답시고 온갖 젠체를 늘어놓는 가진 어른들의 볼멘소리를 언제까지 들어줘야 하는가?
나는 이제 더 이상, 살기 힘들어서 세상을 저버린 친구들의 시체를 치우고 싶지 않다.
그게 나의 소박한 희망이고 꿈이다. 그러니까 제발 그 입이라도 다물었으면 소원이 없겠다. 양보하라고 안 할 테니 그까짓 되도 않는 양보 같은 거 하지 말고 뭔가 아는 척 당신들의 삶을 자랑처럼 늘어놓지도 말고 그냥 입이라도 다물었으면 좋겠다.
백승호의 이름으로 나온 최근 기사 (모두 보기)
- ‘여자친구’ 예린은 정말 초심을 잃은걸까? - 2017년 4월 5일
- 우리는 차분히 멸망을 준비하고 있다 - 2017년 3월 6일
- 너에겐 “달그닥 훅” 하고 쉬웠을지 모르지만 - 2016년 11월 16일
[…] TWENTIES TIMELINE / 필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