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되게 구는 것은 항상 잘못 놓인 흙수저들?

막장드라마가 다 그러려니 하기엔, “내딸 금사월”의 인물들은 너무도 부자연스럽다.

이게 딱 “금사월”만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visual_02여기서 할 이야기는 사실 “내딸, 금사월(이하 금사월)”에 한정할 것은 아니다. 고귀한 출생 내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이가 특정한 사건을 통해 고난을 겪고 좌충우돌한 끝에 자신의 본래 신분을 되찾고 행복해진다는 류의 이야기는, 그밖에도 많았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들 중 가장 최근의 것이 MBC에서 방영 중인 주말 드라마 “금사월”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이 드라마를 가지고 이야기를 해 보고 싶다.

출생의 비밀, 악녀, 막장 등을 고루고루 잘 갖추고 출발한 이 드라마 자체는 재미있다. 지난 11일에 방영된 제12회의 시청률 22.4%는 ‘연민정 없는 장보리2’라는 세간의 평가를 정확하게 반영하는 중상급 히트작의 시청률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금사월”의 에피소드가 진행되면 될수록, 이런 의문이 자꾸만 커져 간다.

‘이거 그냥 넋놓고 보기엔 좀 그렇지 않나?이거, 적절하기는 한 걸까?’

 

꼭 불운한 금수저는 착하고 굳세기만 하고

이번 ‘금사월’의 금사월(백진희 분) 캐릭터 역시, 우리가 아는 그 막장 드라마 여주인공 그대로의 모습이다. 그간 수도 없이 봐 왔던 ‘가련하고 씩씩한, 착한, 그러나 운명이 엇갈린 금수저’인 것이다. 자신이 금수저인지 잘 모르는, 착하고 씩씩한 캐릭터. 그래서 그녀는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자 대표 선역(善役, heroine)이 된다. 억울한 모함도 당하고 악역으로부터 곤경에 처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간에 이 친구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인물이다.

시청자인 우리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우리가 이 캐릭터가 잘 되기를 응원하고 본래의 금수저를 찾아가길 원하게 되는 것은 필연이다. 극의 흐름상 실제로 그렇게 될 예정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이런 캐릭터가 행복해지는 것은 자연히 ‘올바른’ 일이 된다. 착하고, 씩씩하고, 역경에 굴복하지 않는데, 어떻게 이런 주인공을 싫어할 수 있겠으며, 어떻게 그에게 해피 엔딩을 보상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다만, 왜 이 금수저 주인공들은 거의 항상 이렇게 떳떳하고 아무 잘못 없는 가련한 인물로만 설정되는지가 의문이다.

어찌 보면 금사월이란 배우 백진희가 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역이다 ⓒMBC

물론 타의로든 우연으로든 출생이 바뀐다는 것은 억울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면, 그런 억울한 일의 중심에 있는 사람이, 좀더 악하고 어두운 면을 가지게 되었다든가 좀더 비정하고 현실적인 안목을 갖고 살아가고 있다든가 하는 게 더 자연스럽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 인물은 그저 결백하기만 한 대신, 이따금 남 탓 하기 어려운 심각한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일 수도 있다. 출생의 비극이라는 조건을 놓고 리얼하게 생각해 보자면, 그게 좀더 현실에 가까운 귀결일 것이다.

그런데, “금사월”의 경우도 그렇고, 이런 류의 드라마 속에서 그런 경우는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조명되는 것은 그저 금수저 인생에서 흙수저 인생으로 강제 인생역전이 되고 말았다는 그 가여운 처지뿐이다. 그런 처지에 처한 사람이 가엾다는 것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다. 문제는, 그렇게 받아들인 다음에도, 주인공의 그 가여운 상황 하나가 너무 많은 사실 관계를 뭉개고 지나가고 있지 않느냐, 정말 이걸로 충분한가, 등의 위화감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못되게 구는 건 항상 주제 모르는 흙수저인데

이에 더하여, 일일이 따지고 보자면 금수저 쪽보다 더 황당한 유형이 있다. 바로 ‘흙수저 악역’ 캐릭터다. 앞선 금사월 캐릭터가 전형적인 히로인이고 운명이 엇갈린 금수저 캐릭터라면, 오혜상(박세영 분) 캐릭터 역시 참 클리셰적이다. ‘본래 평타 이하의 신분이지만 자의 혹은 운명으로 인해 인생이 역전된 캐릭터’.

철들 때까지는 몰랐던 자기 신분 내지 운명을 다 커서야 알고 난 뒤, 언제 없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자신의 밥그릇을 빼앗기지 않으려 버둥거리는 캐릭터들은 오혜상 말고도 여러 드라마에서 그간 종종 등장했었다. 오혜상이 다른 점은 그 자신이 본래 흙수저임을 진작부터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녀는 지금 당장 그녀의 수중에 있는 ‘내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행동을 하는데, 이게 악역 짓이 되고 있다.

그녀는 과연 연민정을 뛰어넘을 것인가? 세간의 관전 포인트는 모두 거기에 쏠려 있는지도 ⓒMBC

그런데 그 악역 짓이라는 것, 가만히 생각해 보면 ‘굳이 저렇게까지 조바심 낼 필요가 있나’ 싶은 것들이 상당히 많다. 설계 아이디어를 훔치고, 자작극 누명을 만들어 씌우고… 자기의 천한(?) 출생과 열등감 때문에 그러려니 봐 주기엔 좀 어려운 ‘오버액션’이 많다. 적어도 현실적인 관점에서는, 그녀의 출생의 비밀이 그녀의 이후 신변에 악영향을 끼칠 위험이 그리 높지 않기 때문이다.

대체로 출생의 비밀이라는 것은 좋은 집안 아래에서 키워질 만큼 키워진 최소 20대 중반 즈음에 밝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간 키운 인지상정 때문에라도, 그 비밀이 드러난 이후 이 흙수저들이 부유한 집안으로부터 내버려지는 일은 현실에서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 드라마에서는, 뭔가 돌이킬 수 없는 죄나 잘못을 저질러서 ‘내쳐질 수밖에 없는 명분’이 생기면, 아차 하는 순간 쫓겨나는 게 양자고 양녀다. 그래서 이런 ‘흙수저 악역’ 인물과 그 주변 가족들을 보면 이젠 진심으로 묻고 싶어진다. 당신들은 그래야만 하느냐고, 그럴 수밖에 없는 거냐고, 다른 선택지, 다른 역할은 못 하느냐고.

 

이게 다 결국 자기 수저 자리 찾자는 얘기일 뿐이라면

왜 이런 역할론과 출생의 비밀, 암투가 계속해서 그려질까? 그 이유를 콕 찝어 하나만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실 고귀한 출생이 고난과 역경을 딛고 행복해진다는 플롯 자체가 워낙에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흥행 공식이니. 다만 여러 정황과 심증을 가지고 생각해볼 여지는 있을 것이다.

일단 시청자들의 성향이 원인의 하나일 수 있다. ‘노오력’만으로는 압도적인 수준의 행복을 성취할 수 없다는 기저 사상을 깔고 있는 시청자들에게 ‘알고 보니 금수저’란 얼마나 희망적인 상상인가. 또한 드라마를 제작하는 쪽의 입장도 있을 것이다. 출생의 비밀 같은 것을 도입하지 않은 밋밋한 극본으로는 ‘누가 봐도 잘 되어 있는’ 해피엔딩의 주인공을 보여주기가 매우 어려울 테니까. 흥행 공식에서 벗어난 집필 방향을 고수할 여유가 없을 수도 있다. 그리하여, 아마도 이런저런 현실적인 사정들이 모여 제2, 제3의 장보리를 만드는 원동력이 되고 있을 것이다.

그런 현실적인 이유들을 다 고려하고 참작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따지고 싶은 것이 하나 남는다. 이런 드라마에서 핵심적이라 할 수 있는 부분, 말하자면 ‘내핏줄주의’(심지어 드라마 제목도 “내딸” 금사월이다!)와 거기에 기반한 나름의 권선징악에 대해서다. “그러면, 결국 이 드라마가 하고 싶은 말이란 금수저의 것이 금수저한테 가는 건 올바른 일이고 흙수저가 흙바닥 제자리로 돌아가는 건 권선징악이란 말인가?” 나는 지금 이것이 진심으로 궁금하다.

내가 너무 삐뚤게 보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금사월’을 포함해 그간 이런 프레이밍으로 읽힐 여지를 충분히 보여 준 드라마들이 많이 있었다. “못된” 흙수저가 “착한” 금수저의 밥그릇을 뺏는데, 그건 잘못됐다는 식의 생각의 틀 말이다. 물론 주요 시청자들의 연령대를 살펴보면, 이런 이야기들의 인기는 이런 측면보다는 ‘내핏줄주의’의 숙명이 만드는 희비극에서 더 많이 나온다. 하지만, 이 이야기 구조 자체와 그 구조가 시청자에게 씌우는 프레임 때문에, 뭔가가 자꾸 눈에 밟히는 것이 있어서, 다 그런 것이려니 하고 넘어가기가 어렵다.

이야기 속의 ‘나쁜 흙수저’들을 동정하거나 정당화하고 싶은 거냐고? 물론 아니다. 이런 드라마들이 ‘금수저’들의 기득권 재생산과 계급 이동 시도 차단을 위한 세뇌의 도구로 쓰이고 있다는 식의 음모론을 펼치고 싶으냐고? 그것도 아니다. 다만 이 줄거리 구조가 비현실적이지 않느냐고 말하고 싶다. 악역들은 비판받을 수밖에 없는 행동을 굳이 저지르고, 그러면 아니나 다를까 그에 맞게 벌을 받고, 종국에는 ‘착한 금수저’에게 모든 것을 되돌려준다. 이 줄거리 자체가 너무 안이하지 않은가? 왜 표독한 성격, 음험한 계략, “너만 없었어도 모든 게 괜찮았어” 따위 틀에 박힌 대사는 항상 ‘흙수저 악역’의 것인가? 의문을 제기할 여지도 없던 부분에 일단 의문을 품고 나니, 너무 많은 것들이 복잡해지는 심정이다.

 

이런 우화를 계속 되풀이하는 건 문제가 있지 않은가?

이런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실은 온갖 막장 드라마를 열심히 욕하면서 챙겨 보는 편이다. TV 화면 앞에서 부글부글하면서 ‘언제 저 나쁜 녀석 박살나나’ 벼르고 있는 반도의 흔한 시청자다. 하지만, 이게 과연 맞는 걸까 싶다. 내가 이토록 재미있게 보고 있는 드라마를, 그 속의 인물들을, 그들의 행동들을 보며, 과연 이걸 그냥 그런 것으로 받아들이고만 있어도 좋은가 되돌아보고 있다.

왜냐하면, 내가 그리고 이 나라의 시청자들이 대체 무엇을 해소하기 위해 무엇을 보고 있는가를 알 수가 없어서다. 서두에 소개한 “금사월”의 수식어만 봐도 그렇다. ‘연민정 없는 장보리2’라니, 대체 그런 드라마는 왜 필요할까? “왔다! 장보리”의 연민정 같은 강력 악역도 없으면서, 내용은 “장보리”와 별 다르지 않은 그런 드라마를, 왜 굳이 우리는 또 만들고 또 시청하는 걸까? 우리는 지금 뭐가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는 것일까?

우리에겐 미운 오리 새끼 우화의 드라마 버전이 몇 가지나 더 필요한 걸까?

내가 너무 과하게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 생각이 틀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흙수저는 항상 악독하고 금수저는 그저 불운하면서도 씩씩하기만 한 ‘금사월’ 같은 줄거리들을, 그저 일개 드라마의 연출이려니 하고 넋놓고 보기엔 좀 그렇다. 그 사실 하나만큼은 틀림없다고 본다. 그냥 ‘일개 드라마’로 치기엔, 그 드라마라는 것이, 워낙 많은 사람들이 보는 상품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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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보니 아이돌 글을 연재씩이나 하게 된 글쟁이. 지속가능한 팬질을 위해 끄적이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