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11일 19시 14분
어머니, 알바 자리가 잡혔습니다. 새로 생긴 동네 카페입니다. 면접을 보았는데, 남자는 아직 저 말고는 없다면서 바로 내일부터 나오라고 합니다. 덕분에 다음 월세도 문제없이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학원을 아주 다니지 않을 수는 없어서 오전 근무를 희망하였는데, 다행히 그것도 잘 조정이 되었습니다. 지난 번에는 면접이 부족하여 아쉽게 떨어졌으니, 이번에는 부지런히 연습하여 어머님이 보시는 신문에 제 이름으로 올라간 기사를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벌써 3년이 다 되어 가는지라 어서 성과를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나가봐야 해서 이만 줄이겠습니다.
2014년 12월 9일 17시 25분
어머니, 오늘은 일을 하루 쉬었습니다. 가벼운 감기에 걸렸습니다. 작년부터 창문이 낡아 제대로 잠기지 않더니, 추운 날씨에 찬 바람이 들어온 듯 합니다.
업무 자체에는 아무 지장이 없지만, 마스크를 쓰고 일하거나 아픈 낯을 보이면 손님들이 싫어할 것 같아서 빨리 집에서 완쾌해서 오겠다고 사장님에게 부탁하고 하루 병가를 내었습니다. 지금은 병원에 다녀온 뒤 따뜻하게 샤워하고, 사 온 죽 한 그릇을 데워 먹고 이불 속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집 주변도 별로 시끄럽지 않고 그저 조용합니다.
전화 마지막에 사장님이 혀를 차며 ‘알바비 아깝게 아프고 난리’라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전화가 끊어진 줄 아셨나 봅니다. 대꾸할 말이 없었습니다. 아프고 싶어서 아픈 건 아니지만, 아무튼 몸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제 잘못이니까요.
오늘 들어오면서 우편함을 보니 도시가스 요금 고지서가 와 있었습니다. 병원비도 그렇고 제가 서투른 탓에 내야 하는 돈들이 좀 있네요. 하지만 아직은 괜찮을 듯합니다.
감기 자체는 정말 별것 아닙니다. 의사도 그렇고 제가 봐도 그렇고, 내일 아침이면 완쾌될 수준입니다. 다만 더 심해지지는 말아야겠으니 오늘은 그만 자려고 합니다.
2014년 12월 18일 0시 47분
어머니, 오늘은 올 해 마지막 작문 스터디가 있었습니다.
외우고 배운 것은 후회 없이 전부 다 썼습니다. 그런데 답안지를 다시 검토하려다가 갑자기 너무 많은 것들이 생각나 제대로 읽어보고 나오지 못했습니다. 정말 올해도 이렇게 끝나는 걸까, 하는 생각에 먹먹해져서입니다. 저는 신방과를 졸업할 때쯤 되면 멋진 예비 기자가 되어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그냥, 열심히 쓰고만 있습니다.
내년에는 다른 스터디를 구해야 합니다. 같이 수학하던 친구들의 반은 포기를 하였고, 나머지 반은 다른 길을 찾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저는 내년까지만 더 해볼 요량입니다. 비용은 걱정하지 마세요. 사실 알바를 시작한 건 그 때문입니다.
그저 이 모든 게 이렇게 조용하게 끝나는가 싶은 허탈한 마음에 몇 줄 적어 봅니다. 제가 답안지를 낼 때쯤 둘러보니, 그 넓은 강의실에 남은 사람은 고작 여섯이었습니다.
여기는 눈이 내립니다. 그곳은 지금 어떤가요. 조만간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2014년 12월 26일 11시 59분
어머니, 오늘 저는 이 카페에서 일하면서 처음으로 급여를 받았습니다.
지난 30일부터 일요일 빼고는 거의 매일 출근했습니다. 3일에 하루 쉬었고, 고등학교 동창들 송년회 때문에 지지난 토요일에 하루 빠진 것 말고는 안 나간 일이 없으니까요. 그리고 저는 22일 동안 8시간씩 일한 것을 “다른 데보다 더 쳐준다”라면서 105만 원 정도를 받았습니다.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주휴수당이라는 것이 들어가지 않은 계산이었습니다. 그런데 왜일까요? 그 사실을 알고 나서도 화가 나지는 않았습니다. 됐다, 뭘 벌써부터 서로 얼굴 붉힐 것 있나, 사장님도 아주 못된 사람도 아니고, 나도 초기에 아파서 쉰 건 사실이니까, 좀 기다려 봤다가 눈치 봐서 나중에 계약서든 유급휴가든 쓰면 되지, 그냥 이런 생각들이 드는 겁니다.
며칠 미룬 방세를 제가 직접 주인에게 연락해서 납입했습니다. 그러다가 중고등학생 때 집에 들어오면서 우체통에 가득 쌓인 고지서를 집어 부엌 식탁에 던져놓고 “이런 건 좀 빨리빨리 해결하시라” 투정부렸던 기억이 났습니다. 그 비용을 어떻게 다 내고 사셨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제가 철이 없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대로 취직할 때까지 일단은 열심히 하려고 합니다. 걱정 마시고 지켜봐 주세요.
2015년 1월 2일 1시 32분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아버지 어머니 동생들 다 보고 싶어요.
못난 놈이 새해 인사 드리러 내려가 보지는 못하고 먼저 걸어 주신 안부 전화를 받았습니다. 벌면 얼마나 번다고, 이 집안에서 온갖 바쁜 체는 혼자 다 하는 듯해 죄송한 마음입니다. 어서 빨리 어엿한 장남 노릇을 하고 싶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요즘 토요일 출근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적어도 이번 연휴는 엄마랑 동생이랑 같이 편하게 쉬세요. 혹시나 저 때문에 안 나가도 되는 특근을 하고 계신 거라면,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저도 이제는 완전히 적응해서, 요즘 이곳은 한가하게 느껴집니다. 주 3일 정도만 출근하고 그 시간에 투잡을 뛸까 싶을 정도입니다. 요즘은 타이핑 알바가 대세라고 하더군요. 다른 사람들의 인터뷰나 회의 내용을 녹취한 걸 타자로 쳐서 옮기면 장당 얼마씩을 주는 거예요. 그런 걸 좀 해 볼까 합니다.
P. S. 지난번에 말씀하신 갑상선은 어떠하신가요?
2015년 1월 4일 11시 20분
어머니, 오늘 저는 아는 형에게 얼마간의 돈을 꾸었습니다.
지금껏 정신 없이 바빠서 제대로 확인도 안 하고 살았던 이메일을 어제 아침에 괜히 들어갔다가 통지서를 열어 보았습니다. 학자금 대출 거치기간이 끝나 이자가 발생하였으니, 어서 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아침 한 10시 되니까 마침 전화가 걸려옵니다. 은행이었습니다. 이메일 보았느냐고 하길래 방금 보았다고 답했습니다. 기한은 내일모레이며, 이번까지 연체할 경우 신용등급이 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달리 더 할 수 있는 말이 없어서 전화를 끊었고, 막막했습니다. 다음 급여일까지는 아직 3주나 남았는데, 대체 어떡해야 돈 나올 구멍이 생길까.
정말 다행스럽게도 아는 형이 언제든지 전화하라며 명함을 준 기억이 있어, 그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20분 정도 고민하고 전화를 걸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정말 다행히도 그 정도는 줄 수 있다. 다만 이자만 잘 내라고 말하기에 꾸어다가 학자금 대출 이자를 내고 다녀왔습니다.
아무튼 그래서 연체는 면했습니다. 다만, 일전에 말씀드렸던 투잡을 이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남들도 다 그렇게 사니까 나도 그렇게 해도 되겠지, 별 문제 없겠지 하며 어영부영 했던 선택과 행동들이, 비용과 지출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솔직히 이런 걸 어디 가서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서, 못난 모습을 이런 자리에 풀어내고 있습니다. 불효만 하는 장남이어서 죄송합니다.
다음 번엔 좀더 안심되실 만한 소식으로 인사 드리겠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2015년 2월 4일 22시 20분
아버지도 그러셨겠지요. 저 때문에 갑자기 목돈이 나가게 되었을 때마다 아무렇지도 않게 출근하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때의 저는 몰랐지만, 그때도 아버지의 하늘은 무너지고 있었겠지요. 그리고 아버지는 제게 들키지 않으려고 일부러 평범한 복장을 갖추고 나가 돈 나올 구멍을 찾고 계셨겠지요.
감사합니다. 지금의 저와는 비교도 안 될 그 막막함을 헤쳐나와 주셔서.
2015년 2월 19일 23시 20분
어머니,
서울은 김치 맛이 꽤나 나쁩니다.
어머니와 함께 했던 김장이 생각납니다.
같이 곁들여 해주시던 수육과 함께
배부르게 먹고 싶습니다.
최근에는 야간 알바를 시작했습니다.
아! 곧 나가봐야 할 시간입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그럼.
…
1) 본 기사는 한국전쟁 당시에 작성된 '학도병의 편지'라는 편지를 인용하였습니다,
2) 기사는 학자금 대출을 받은 다수 익명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재구성되었습니다
3) 기사에 언급된 내용은 실제 인물 및 단체와 관계 없습니다
새해에는 우리에게 더 많은 선택지가 주어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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