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폰을 귀에 꽂고 오늘 나온 신곡들을 트랙 리스트에 넣었다. 노래에 몸을 맡기고 이리저리 흥겹게 리듬을 타며 정신이 아득해질 때쯤, 유난히도 귀에 박히는 문장이 있었다. 잘못 들은 거겠지. 노래를 처음부터 다시 재생시켰다. 하지만 그 가사는 여전히 이상했고, 쉽게 이해되지도 않았다.
단 한 번도 ‘여자의 사랑’을 상상해본 적 없는 듯한 이 가사는, ?누구의 작품일까.
생각해 보면 한두 곡이 아니다. 항상 여자는 “여자니까 하루 더 기다리고 / 여자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붙잡지 못”하는 포지션을 가지고 있는 반면, 남자는, “남자답게 눈물도 애써 삼키고 / 남자답게 웃으며 돌아”서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렇게 지금의 노래들은 사회에 정형화돼 있는 ‘성별에 따른 사랑 방식에 대한 프레임’을 명시해 준다. 마치 세상의 모든 사랑에 대한 법이라도 제정하겠다는 듯한 기세로.
남성 작사가가 가사를 짓고 여성 아이돌이 노래를 부른 이 노래들 속에서, 사랑에 빠진 ‘소녀’들은 수동적이고, 수줍어하며, 자신의 사랑에 대한 욕망을 감추기에 급급하다. 단지 남자들이 다가오기를 원하며 기다리고 있을 뿐, 그 이상의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행동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여성들이라고 어째서 가만히 있고 싶겠나.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수줍어 말도 못하고, 그가 다가와 주기를 가만히 기다리는 여성도 있겠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거는 여성도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현실의 노랫말에서 그런 여성은 존재할 자리를 잃는다.
반대의 경우라도 다를 것은 없다. 여성 작사가를 통해 노래되는 보이그룹 사랑 노래 속의 백마 탄 왕자님은 다른 어떤 것도 필요 없다. 그녀의 사랑하는 마음만 있다면 자신의 목숨이라도 바친다. 그 세계 속에서 인정받는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 옆에서 항상 지켜주고, 헌신하며, 사랑하는 그 마음 말고는 어떤 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리고 이 통념은 반복적으로 재생산된다. 분명 오늘 나온 신곡인데, 그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사랑’은 어제나 지난 주, 지난 달에 접한 것과 너무도 비슷한 모양으로 찍어져, 음계만 바꿔 흐르고 있다. 그 ‘사랑’은 가요라고 하는 강력한 수단을 통해 많은 이들의 통념 속으로 자연히 배어들어가고, 다시 이것은 “모두가 공감하는 사랑 이야기”가 되어, 고스란히 다음 사랑 노래의 가사로 나온다.
하지만 세상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는 사랑 이야기만이 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100명의 사람이 있으면 100가지 사연이 있는 법이고, 이런 사랑이 있으면 저런 사랑도 있기 마련 아닌가. 대중가요를 통해 일괄적으로 생산되는 몇 가지 형태의 사랑 말고도, 이 세상 사람의 수만큼이나 다양하고 풍부한 내용과 색과 맛을 가진 것이 사랑일 텐데 말이다.
진실한 사랑 노래를 좀더 듣고 싶다. ‘누가 불러도 어색하지 않은 사랑 노래’라고나 할까??부르는 사람이 남자든, 여자든 관계 없이 한 명의 ‘사람’으로서 느끼는 감정을 자연스럽게 노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우리는 언제가 되어야 사랑에 대한 살아있는 시각을 가질 수 있을까. 모든 남자에게 당연히 해당되는 사랑, 여자라면 당연히 공감할 거라는 사랑 얘기 말고, ‘사랑’ 그 자체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듣고 싶다는 마음은, 그렇게나 과하게 유별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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