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 탈출도 충성도 할 수 없다면? 목소리를 내야”

시대 갈등과 냉소주의에 관한, 전상진 교수님 인터뷰 제 2편.

지난줄거리

전 여기서, 일종의 하나의 ‘시대’ 구분을 하고, 거기에 맞춰서 각각의 ‘시대에 적합한 세대’라고 하는 식으로 얘기를 하면 좀더 편하겠다고 생각을 해요. 그게 뭐냐면… 이른바 ‘영웅적 시대’와 ‘포스트 영웅적 시대’다, 라고 하는 식의 표현이 있어요. 이건 역사학자들, 세대 연구자들도 많이 쓰는 거고요.

한국에서는 말 그대로 리더 아니면 오너에게 모든 게 집중돼 있고, 하극상이라고 하는 걸 용납하면 자신의 지위가 흔들릴 거라는 식의 어떤 편집증 비슷한 게 있죠. 또 하나 무시무시한 건. 금방 우리가 얘기했던 그 기장과 부기장의 대화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그게 그 조직의 성원 내부에 곳곳에 침투해 있다는 거예요.

 

‘헬조선’이라는 냉소주의로의 이동 ← 지금 여기

여기서 잠시 전상진 교수는 박수를 가볍게 한 번 치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뭔가 중요하게 집중해서 전달할 것이 있는 듯했다.

이거를 얘기해야 할 것 같은데. 서구 조직사회학 쪽에서 보면, 조직의 원리 아니면 리더십의 원리가 ‘포스트 영웅적인 리더십으로 바뀌었다’ 하는 얘기들이 많이 나와요. 리더십의 형태가 바뀐 가장 중요한 요인은, 권위적 조직이 그 조직구성원들의 냉소주의를 강화시켰다는 거에요.

조직 구성원인 나는 이 권위적인 행태에 대해 동의하지 않아요. 하지만 이 조직에서 말 그대로 밥을 먹으려면, 복종하는 모습은 보여줘야 되죠. 이게 냉소주의의 아주 전형적인 모습이잖아요. 위에서 명령하는 것을 따르되, 내 속은 완전히 다른 거죠. 그런데?조직구성원들에게 필요한 여러 덕목들 중에는 일정 정도의 충성심과 헌신이 있거든요.

조직으로선 일정 정도 충성이 필요하다는 거죠?

그래야 조직이 제대로 굴러가니까요. 그런데 서구 같은 경우에는 80년대부터 이미 조직구성원들의 냉소주의가 너무 강해졌습니다. 권위적 조직, 관료적 조직 속에서 사람들이 자기 자신과 조직의 목표라고 하는 것을 일체화시키지 못하니까, 막 사람들이 냉소적으로 되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생산성이 떨어지고. 업무 효율도 떨어질 수밖에 없는 거죠.

전상진 교수가 답변을 위해 뭔가를 조목조목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때부터?리더십이 변해요. 어떤 사람들은 그걸 ‘포스트 영웅적으로 변한다’라고 말해요. 아주 간략하게 얘기하면, 수평적 리더십이 됐다는 거예요. 의사결정을 할 때, 구성원들이 모여서, 함께 조직의 목표를 구성하는 식으로 한다는 거죠.

물론 거기에는 여러 한계가 있어요. ‘그게 실제로도 그러냐, 푸코(Michel Foucault)가 말한 거버멘탈리티(governmentality)의 하나일 뿐이다’ 등등.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건, 리더십의 궤적이 바뀌고 있다는 겁니다. 왜? 냉소적 노동자들이 너무 많아졌기 때문에. 조직 내부부터 썩어가는 걸 알아서, 경영 조직의 혁신들이 이루어진다. 뭐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해요.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한국에 지금 권위적 조직의 가장 큰 문제는 냉소적 노동자가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어서거든요. 조그마한 충성과 헌신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 업무 효율이 올라갈 수가 없고, 그 조직이 잘 될 리가 없지요. 그런 차원에서, 직장 예절 교육이라는 건 냉소적 노동자들의 코웃음을 훨씬 더 강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 이거는 굉장히 문제다. 저는 그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아요.

하긴 ‘월급 받은 만큼만 일하자’, ‘어차피 나는 금방 그만두고 딴 데 갈 거니까’ 하는 생각들을 점점 더 많이들 하고 있거든요. 예절 지켜 가며 열심히 일할 사람이 없는 거 같아요.

사실 냉소적 노동자들에 대한 위기의식은 굉장히 많이 갖고 있을 거예요. 모든 조직에 다 있잖아요. 심지어 시민단체 속에서도 세대 문제로 보이는 냉소주의가 자꾸 나타나고.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세대 문제는, 아까 맨 앞에 제가 설명드린 대로 ‘영웅적 조직과 포스트 영웅적 세대들 간의 불화’라는 문제 때문에 냉소주의가 나타나는 거거든요.

네, 그렇게 연결이 되네요. 위에서는 하라고 하고, 아래에서는 수긍을 하는 척만 하고, 속으로는 전혀 딴생각을 갖고 있고.

아까도 얘기했지만 1980년대 미국 같은 경우에는 이게 굉장한 사회적인 화두가 됐었어요. 이러다가 우리 완전히 일본에 완전히 죽는 거 아니냐. 일본은 70년대까지만 해도 서로 똘똘 뭉쳐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그런데 최근엔 일본에서도 그런 냉소주의가 발견돼요. 후루이치(古市憲?) 교수의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은 한 번 읽어보세요. (몸을 일으키며) 여기 어딘가 꽂혀있을 텐데?

아뇨 제가 나중에 확인해 보겠습니다.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같이 읽으면 좋은 책 3

(다시 앉으며) 아 네 그래요. 아유 나도 어딨는지 못 찾겠다. 여튼, 지금 우리도 요새 달관 세대다 사토리 세대다 이런 식으로 얘기가 나오잖아요. 그거는 사실 일본 사회학자들의 얘기를 본의와 전혀 무관하게, 창의적으로 해석을 한 거거든요. 이번에도 조선일보네요. 아무튼 그런 냉소주의가 커지면 사회가 활력을 잃어요. 헬조선이라는 담론이 전형적인 냉소주의의 증언이거든요.

아하 네.

자기는 엑시트를 하겠다는 거죠. 근데 뭐 하려 해도 못 할 거예요. 안타까운 일이고.?사회학자로서는 조직의 문제나 전체 사회의 문제가 재미있기는 해요. 미시와 거시를 관통하는 이론이 확증되는 쾌감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현상 자체는 굉장히 우려스럽고 안타까운 일이죠. 이 만연한 냉소주의라는 게.

요즘 오바이트가 나오는 거 중에, ‘3.1절 됐으니까 태극기 꽂으세요’, 뭐 이런 구호가 있고, “아니, 친일파가 나라를 잡아놓고 있는데, 무슨 태극기를 꽂는단 말이야?” 하는 냉소주의가 있잖아요, 이게 조직에서도 그렇고, 부모자식 관계도 마찬가지고. 부모가 “공부 졸라 열심히 해야 돼” 이런 식으로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하는데, 해 봐야 뭐해? 아이들은 이미 아는데. 그럼 냉소적으로 되는 거죠.

그래서 말 잘 듣는 척은 하지만…

속으로는 완전히 딴생각 한다는 거죠.?그러니까 이런 이중성, 조현증, 분열증이 나타날 수밖에.?이 세포 하나하나가, 미시적인 영역까지 다 냉소주의가 너무 파급이 된 것 같아요. 아유…

그래서 요즘 이런 식의 얘기를 하게 되면 항상 허탈해! 그렇다고 뭐 뾰족한 해결 방향이 있는 건 아닌 것 같고, 그래요. 근본적인 부분에서 뒤흔들리고 있으니까. 하나하나 해결하기 위해서 앞으로 나아는 가야 하는데, 이거는 뭐 지금 우리가 갖고 있었던 뭔가까지도 뿌리부터 막 파괴되고 있다고 느껴지니까.

전상진 교수가 인터뷰 도중 잠시 일어나 쉬고 있다

 

불안감으로 가득한 이 전환기에, 교육 아닌 상호학습이 필요하다

일말의 실천 가능한 해결점에 대해서 얘기해 보고 싶습니다. 혹시 예절의 내용 자체가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요? 예컨대?수직적인 예절을 수평적인 구조의 예절로 대체하면, 수평적 리더십이 자연히 생겨나고 냉소주의가 해소될 수 있을까요?

완전히 동의하기는 어렵네요. 서구에서는 그런 식의 변화를 많이 얘기해요. 소프트 캐피탈리즘(soft capitalism), 쿨 캐피탈리즘(cool capitalism) 등등 각각 개개인의 헌신과 충성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조직에서 문화라고 하는 요소, 아니면 이니셔티브(initiative, 진취성/결단력/자주성/독창성)라는 요소를 조직의 의사결정 과정에 자꾸 투입하려고 해요.

그런데 저는 이게 꺼림칙하다고 생각해요. 왜냐면 그것 자체가 사실은 어떻게 보면 착취를 활성화시키는 것이라고 하는 생각을 저는 하고 있습니다. 이건 최악의 경우에 노동자가 자기 스스로 번아웃(burnout)이나 소외되길 더욱 강화시킬 뿐이에요. 이건 그냥 제 생각이고.

아뇨 어떤 말씀인지 이해는 됩니다. 예컨대 노동자가 경영회의를 통해 스스로 결정한 것을 즐겁게 수행하더라도, 결국 자기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자발적으로 착취당하는 것뿐이지 않느냐는 말이죠.

네 대략 비슷합니다. 그리고 약간 회의적인 게, 우리가 대기업이나 재벌을 비판하고는 있지만, 한국 경제 워낙에 그들에게 크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한 발자국만 잘못해도, 와장창 무너진다는 위험이 있어요. 개성공단 하나 폐쇄했던 것이 파급력이 그렇게 컸잖아요. 물론 개성공단이 작진 않습니다만. 그런데 만약에 예를 들어 두산이 엎어진다? 두렵죠. 쉽게 바뀌겠어요?

ⓒ서울신문

두렵다고 말씀하시니까 갑자기 생각이 나는데요, 문제의 조선일보 기사에서 그걸 언급하셨어요.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사회.

아 네, 그랬죠.

저도 동의합니다. 지금 사회도 뭔가 불안하고 위태롭잖아요. 하지만 방금 말씀대로라면 크고 작은 조직들의 구조와 문화를 바꾸는 것도 마찬가지로 두려운 일이 되는데요. 변화가 온다고 하면, 어떻게, 어떤 수단을 통해서 오게 될까요?

일단 교육, 교습의 차원에서 해결할 일은 아니라고 봐요.?길리건(Carol Gilligan)이라고 하는 사람이 미국 사회가 불안정할 때 얼마만큼 범죄와 정신병이 촉발되었느냐 하는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아주 딱 들어맞지는 않겠지만, 한국에도 적용 가능한 이야기거든요.?다들 분노장애를 많이 얘기하는데, 제가 볼 때 이건 심리학적이라기보다 사회적인 문제예요.

요즘의 ‘묻지마 범죄’ 같은 것들은, 우리가 지금 얘기하는 불안정성이라고 하는 큰 맥락 속에서 나타나는, 그 고통을 나름대로 해소하려는 사람들이 발버둥치다가?폭력적인 형태로 발현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심지어 이혼이라든가, 아동학대라든가, 자살이라든가. 아니면 하다못해 도로에서 폭주족이 된다거나, 다 비슷해요. 뭔가 해소를 하긴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거죠.

그런 사람들 앞에서, ‘예절을 지켜야 됩니다. 예절을 교육’…? (코웃음) 햐, 이게, 그게 굉장히 필요하다는 건 알겠는데, 그럼 도대체 예절을 어떻게 이식하겠냐는 얘기야. 아무리 생각해도, 사회학자인 저로서는… 모르겠어요. 경제학자들은 이렇게 얘기하겠죠. ‘상벌을 잘 줘야 한다.’ 근데 저는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그렇다고 해서, ‘사회구조를 바꿔야 됩니다’ 이건 그냥 무책임한 얘기야. (한숨) 그러니까 하나마나한 진단이지.

그래도 지금은 세상이 포스트 영웅적으로 바뀌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시점에 이런 사회적 손실이나 마찰을 좀 줄여나갈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이랄까 방안이 있다고 한다면…

잠시 고민하던 전상진 교수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얘기해 보면 어떨까요. 저는 사실 체벌에 대해서 반대를 해요. 하지만, 체벌 문제가 그렇게 쉽지 않은 문제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지금 학교에서 체벌 못하게 되어 있잖아요?

근데, 체벌이라고 하는 건 결국 교실의 질서를 잡기 위한 궁여지책의 속성을 갖고 있어요.?그런데 체벌로 유지하던 그 질서가 다른 질서로 넘어가게 되게 된 거잖아요. 그러면 과도기적인 혼란이 생길 수밖에 없는데, 한국에서는 ‘왜 안 되는가’, ‘그럼 어떡하면 되는가’ 하는 고민도 없이 “안 된다더라” 하고 바로 없앴어요. 그 과정에서 치러야 하는 희생이 생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었어요.

음… 쉽게 이해가 안 되는데요.

어제까지 애들을 때려서 통제하던 선생의 입장이라고 치면, ‘이제부터 안 된대요’라고 하면, 사실은 이 선생도 패닉 상태에 빠지는 거죠. 학생들을 컨트롤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는 거니까.

아, 이해했습니다.

ⓒ오마이뉴스

사실은 서구도 이런 과정들을 겪었어요. 그런데 서구에서는 이런 이행기 때, 사회 내부에서 수도 없이 많은 토론이 일어났어요. 다툼도 있었고. ‘이런 문제가 생기면 어떡합니까? 저런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합니까?’ 하는 식으로.?그런 사회 전체적인 수준에서의 토론이 그 사회 곳곳의 세포 속으로 스며들어요.

그러면 학생들도 교사들도 ‘아, 체벌이라고 하는 게 나쁘구나, 학생들 우리가 이러이러하게 하면, 학교의 질서가 무너지게 되고, 그러면 이런저런 이유로 친구들에게 폐가 되겠구나’ 하는 식의 상상의 여지를 갖게 돼요. 그리고 그게 학생을 바꾸고 선생이나 학부모를 바꾸는 거죠.

그런데 우리는 그런 토론 없이…

그런 것 없이, ‘인제부터 안 돼, 땡!’ 이러고. 그러니까 몰래 때리고, 사람들은 냉소적으로 될 수밖에 없는 거에요.?지금 전혀 다른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한 가지가 관통하는 겁니다. 우리가 어떤 세상에서 살아 왔는지, 문제가 뭔지에 대해 그 자체를 다같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거예요.

정리하자면,?과도기에서의 혼란을 조절할 필요가 있을 때, 토론 과정 자체가, 어쩌면 과도기에서의 혼란을 줄이면서 자연스럽게 전환하게 하는 그런 방법이 되겠네요?

그게 유일한.

유일한?

네. 교육이 아니라 학습이죠. 상호 학습. 지금 우리가 인터뷰로 하는 것도 사실은 상호학습이죠. 그런 의미에서의 상호학습이라고 하는 것 이외에 저는 방법이 없을 것 같아요. 근데 누가, 어떤 조직이 그걸 하겠어요. 훨씬 더 편한 수단이 있다고 다들 믿고 있는데, 영웅주의적으로 권위적으로 시키면 되는데. 그러면 조직 구성원들은 냉소주의가 점점 더 강해지겠죠. 아이러니죠. 뭔가를 달성하려고 노력을 하는데, 그 노력이 오히려 그 달성을 방해하게 될 테니까.

방안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전망이 밝지 못한 거군요.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상진 교수가 “평소 연구하고 있을 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지금의 20대 청년들에게 한 말씀 해 주신다면.

요즘 젊은이들이 굉장히 살기 힘들어졌잖아요. 물론 젊은이들만 힘든 건 아니에요. 굉장히 나이 드신 분들도, 노인 빈곤률이 전 세계에서 최악을 계속 유지하고 있고. 그러니까 ‘누구나 다 힘들다, 너무 앓는소리 하지 마’ 이런 소리도 할 수 없죠. 앞으로 나아질 전망이 전혀 없으니까.

여러 가지 수준으로 보면, 과거 젊은이들에 비교해서,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그래도 물질적인 상황에서는 더 나은 건 분명한 사실이에요. 하지만 과거에는, 뭔가 ‘나의 미래는 지금보다는 나아질 것이다’라는 희망이나 낙관주의가 있었다고 하면, 요즘은 그것이 사라졌다는 거지요. 사람이 물질로만 사는 건 아니잖아요. 현재보다 나은 미래라는 걸 꿈꿀 수 있을 때 오히려 사람들은 더욱 더 큰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따지게 되면, 물질적으로는 예전보다 나아진 듯 보이지만, 주관적인 측면에서 꿈과 희망을 빼앗긴 젊은이들에게 앞으로의 미래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가 상당히 안타깝고 두려운 건 사실이에요. 뭐라고 쉽게 말을 못 하겠네요.

그러시군요.

제 개인적으로도, 과거에는, 마치 그러한 문제의 책임에서 내가 완전히 자유로운 것처럼 얘기할 수 있었잖아요. 저는 대학의 교수고… 그런데 이젠 이걸 남의 책임인 것처럼 몰아붙일 수 없겠더라고요. 왜냐하면, 어후! 내가, 내 몫이 있었을 텐데…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을 적절히 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더 터지는 것 아닌가. 그런 자책 때문에, 그런 부분에 대해서 이래라 저래라 이런 식의 얘기를 하기 점점 더 힘들어지는 건 사실인 것 같아요.

다만 한 가지, 글 잘 쓰시는 김훈 선생이 했던 얘기 중에 그런 얘기가 있어요. ‘자기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극한의 고통까지 몰아붙이는 게 소설가의 임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것을 겪어야 비로소 더 나은 미래를 꿈꾸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얘기를 해요. 그 양반 말씀에 빗대자면, 우리가 느끼는 고통 때문에라도, 그 고통의 원인과 책임이 도대체 어디에게, 그리고 누구에게 있는지를 따져 보지 않으면, 우리들의 고통은 지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 엄정한 현실이다, 그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자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어떤 방향으로 삶의 전략을 선택해야 하느냐.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래도 이 속에서 아주 조금이나마 조금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충성심을 가지고 주어진 과제와 과업들을 수행하는 방식이 있을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게 아니라, 보이스(voice)를 내는 거죠. ‘이 문제를 개개인이 혼자 다룰 수 없으니까, 함께 뭔가 어깨를 겨누고 뭔가를 해 봐야 되지 않을까?’라는 식이 될 수도 있겠고. 또 다른 하나는, 말 그대로 엑시트(exit) 옵션을 취하는 거죠. 나라를 뜨거나, 내부 망명을 하는 거에요.

내부 망명이요?

게임에 심취를 한다던가, 알코올을 한다던가.

일동

(쓴웃음)

ⓒ 박순찬, 경향신문

사실 이건 알버트 허쉬만(Albert Hirschman)이라는 사람이 썼던, 모든 전략들의 세 가지 구성요소라고 해요. 로열티(royalty, 충성심), 보이스, 엑시트. 이 세 가지 중에 뭔가를 하나 해야 하는데, 저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지금껏 많은 젊은이들이, 특히나 요즘처럼 불안정한 시대에 그나마 안정적인 것을 계속 고르려고만 하다 보니까 로얄티 쪽으로 다 흐르는 거죠. 수동적으로 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우리의 삶은, 순응적인 것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도 우리 삶의 옵션이 있을 수 있다는 거. 즉, 다양한 삶의 전략들이 있을 수 있다는 거. 그런 부분을 알아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다시 한 번 요약하자면, 고통의 원인과 책임이 누구에 있는지, 그리고 어디에 있는지를 따져봐야 한다는 거.

또 동시에, 삶의 전략이라고 하는 게, 가장 안정적으로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그 이면에 뭔가 다른 식의 삶의 옵션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거. 이런 것들을 탐색하고 모색하는 것. 이거는 비단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해요. 저 역시, 저도 마찬가지이기도 하고.

네, 말씀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휴,?이렇게밖에 얘기할 수 없어서 아쉽네요.

전상진 교수가 머쓱해하며 뺨에 손을 얹고 있다.

 

뭐가 합리적인 건지를 모든 세대가 함께 탐색해 볼 수 있다면

인터뷰 중간에 그는 자기가 만나는 청년이라곤 학교 학생들뿐인지라 잘 모른다고 하면서도, 본인이 ‘꼰대’가 될 뻔하는 순간들이 왕왕 있다고 했다. 그는 못내 아쉽다는 어조로 말했다.?청년들도 단지 이걸 기성 세대의 감정적 서운함이라고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학생들을 대하면서 느끼게 되는, 어떤 변화들이 있어요. 말도 안 되는 요구들을 하는 사람(학생)들이 조금씩 생겨요. 그런 의미에서 나는 꼰대예요.?그런데,?무조건 젊은이 편에 서기는 어려워요. 꼰대들이 다른 사람들과 공동 삶을 살아가는 기술이 실종된 것처럼, 젊은 친구들도 역시 마찬가지일 수 있다는 거에요. 거기에는 사실 세대가 (따로) 없는 것 같애.

그것도 그렇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특정 연령대의 사람들끼리의 대결이 아니다. ‘오피스 육아’를 하겠다는 부장님의 고집, 그 부장님들을 덮어놓고 손가락질하는 ‘ㅋㅋㅋ’도 아닐지 모른다. 각 사람들이 살아 온 시대를 공부하고, 그들의 가치관 중 어떤 것을 살리고 어떤 것을 과감히 버릴지에 대한 차분하고 성의 있는 대화와 토론이 절실히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나도 교과서적이지만, 눈먼 충성이나 앞뒤 없는 탈출보다는 나은 선택이라는 점에서.

ⓒ The Big Debate South Africa

인터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헤드라인도 읽어보지 않고 거실에 두고 온 그 일간지가 생각났다. 여전히 동의할 수 없는 기사들로 가득하지만, 그래도 오늘은 부장님으로 빙의한 채로, 한번 찬찬히 읽어보려고 한다. 아버지 역시 당신에게 ‘너무나 당연한 것’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도록, 여기서는 내가 한 수 접어 먼저 냉소를 조금 거두어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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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익

조현익

Twenties' Timeline 디자이너. 글 써야 할 때 그림 그리고, 그림 그려야 할 때 글 쓰는 디자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