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러분이 알아 두어야 할 것은,
이건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
”
영화 ‘500일의 썸머’가 6월 30일 CGV에서 재개봉된다.?이 영화를 처음 접했을 무렵, 나는 현실 세계에 널려 있던 온갖 ‘비현실적’인 작품들에 질려 있었다. 청소년 드라마에서는 수능을 코앞에 앞둔 주인공들의 성적이 거짓말처럼 쑥쑥 오르더니 급기야는 결국 명문대 합격으로 이어졌고,?전쟁 영화 속 군인은 총알 한 번 맞지 않고 전쟁터를 누볐다.?진실은 언제나 거짓에 승리했으며, 고뇌하는 주인공은 결국 현실 대신 신념을 멋있게 택했다.
그 줄거리 속에서 일상의 지루함은 사라지고, 총기의 공포는 가려지며, 육체와 정신을 극복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은 생략되어 있었다. 당연히 있어야 할 것들이 없어져 있는 광경을 보면서, 결국 이것은 판타지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아주 많은 것을 보여주며 여러 가지 생각거리를 던져주지만,?진짜 현실적인 것들은 빠진 채 드라마틱한 전개만 이어지니, 결국 나와는 먼 얘기라고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로맨틱영화도 마찬가지다. 주인공은 그들에게 닥친 역경과 시련을 오직 사랑의 힘으로 극복할 뿐이다. 물질적 환경, 생각, 외모의 차이마저 그들의 아름다운 사랑에 끝내 굴복한다. ‘타이타닉’이 그렇지 않던가. 만난 지 며칠밖에 안 된 여인에게 자신의 목숨까지 내 줄 정도로 열렬한?사랑. 영화?속?사랑이란 늘 아름답고, 헌신적이고, 굳건하다. 모든 것을 초월하여 비극적이기에 아름답다. 깨끗하고 새하얀 종이 같은 사랑이다.
그러나 현실의 사랑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케이트 윈슬렛처럼 헌신적이지 않다.일반적인 우리의 사랑은 친구 문제 때문에, 연락 문제 때문에,?심지어는 음식 메뉴 정하는 것 같은 사소한 문제 때문에 싸우고 ?사이가 틀어지곤 한다. 연애를 하기 전까지는 모른다. 자기가 그렇게나 이기적이고, 찌질하고, 약한 존재인 줄을.
하지만?영화 속의 연애는 이러한 현실의 사랑을 온전하게 담지 못한다.?사소한 다툼, 의견 대립, 나약한 모습, 변덕, 자기 경멸은 이야기되지 않는다. 간혹 나오더라도, 결말부에 가서 약속된 듯 해결될 뿐이다.
그래서 그 어떤 판타지도 다루지 않는 실제 현실의 소박하고 진솔한 순간을 다룬 영화가 특별하게 느껴진다. ?예컨대 아르바이트 근무지에 가기 위해 만원의 지하철을 환승할 때, 끝내 해결되지 않는 현실의 문제와 불안함 때문에 잠 못 이룰 때, 아니면 변덕 심하고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고 구질구질한 각자의 성격을 그대로 내보이며 연인끼리?쉽게 흔들리고 다툴 때.?영화 ‘500일의 썸머’에서 두 주인공이 꼭 그랬듯이 말이다.
‘500일의 썸머’에는 마법 같은 사랑 이야기도 없고, 기척처럼 해결되는 우연의 이야기도 없다. 지극히 현실적인 장면들이 이어지지만, 영화 속에서 만나는 그 장면들 덕분에 영화는 빛을 발한다.?이유는 간단하다. 실제 우리가 살아가는 면면을 영화로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토록 소박한 이야기를 초대형 스크린으로 다시 보는 느낌은 과연 어떨까? 대단하고 숭고한 연애담만 나오던 요즘의 스크린에 톰과 썸머의 다툼이 다시 상영될 때, 그 이야기는 더욱 특별하게, 더 깊이 있게 다가올 것이다. 지금 이어지고 있는 재개봉 라인업에 ‘500일의 썸머’가 포함된 것은, 그래서 반갑고, 어쩌면 필요한 일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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