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ㅇㅇ
기획의도
말했듯, 이번 주 먼탐라는 처음부터 끝까지 술 얘기다. 여기서는 ‘누구와 어떨 때’ 마셨을 때 즐거웠다거나 의미가 있었다거나 인상적이었는지를 소개한다. 읽고 나서 여러분의 음주가무 이력을 되돌아봤을 때, ‘음 아주 허송세월은 아니었어’ 하고 자기 스스로를 조금 자랑스러워할 수 있기를!
1. 월말 : 잔고가 천원 단위일 때?(by Y)
그렇게 풍족하게 살지도 않았는데 월말만 되면 통장이 아주 ‘텅장’이다. 꼭 그럴 때 술이 마시고 싶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술자리에 얻어먹으러 나갈 수는 없는 일. 그래서 이번 마지막 주에 딱 하루, 그것도 내 남은 전 재산 안에서 최저 비용으로 최고 효용을 낼 수 있는 밤은 어디 가야 만들 수 있을까, 를 고민하게 된다.?누구와 어떤 술을 어느 장소에서 마실지 한참을 고민하다 보면 시간이 정말 빨리 간다.
보통은 어떻게 하느냐고? 카톡 친구를 두 바퀴쯤 돌려보다, 결국 그냥 매일 보는 동네 친구와 매일 가는 술집에서 매일 먹는 술과 안주를 먹는다. 알고 있는 가격,?익숙한 분위기, 흔한 안주. 딱히 새롭거나 대단한 것은 없다. 근데 뭐 아무래도 상관없다. 월말이라서 그런지 술 생각이 간절해서 그랬는지, 한 달 중 가장 단 술이 이때 여기 있으니까.
2. 엄마랑 같이 : 술에 대한 지론을 들으면서 (by S)
우리 엄마는 술에 대해서만은 굉장히 엄격하신 분이다. 일단 1300원짜리 소주는 술이 아니다. 그건 공업용 알코올에 물을 섞어놓은 것일 뿐이다. 당신이 직접 전통주 공방까지 가서 술 뜨는 법까지 배워오신 분이니까 그러려니 한다. 그런데 우리 엄마의 확고한 기준에 따르면 도수가 낮은 술도, 과실주도 술이 아니다. 그런 것들은 조금 더 발효된 주스거나 소화제거나 감기약인 것이다. 그리고 어린애가 아플 일이라곤 배 아프거나 감기에 걸리거나 하는 것밖에 없으니까… 엄마는 자주 나에게 그런 것들을 주셨다.
가끔 내가 눈살을 찌푸리며 “엄마 이거 술 아니에요?” 하면, 엄마는 늘 “이건 그냥 주스지. 몸에 좋으니까 다 마셔” 하셨었다. 그 효소인지 주스인지 하는 건 참 묘해서 금방 얼굴이 빨개지던 엄마의 애인이 “간이 안 좋아서 그래요, 그만 마셔요” 하고 엄마한테 꾸중을 들을 땐 또 술이 되었다. 그러고 날 한 잔 더 주면 어린 마음에 그게 그렇게 좋을 수 없었는데. 술 한 잔이 그렇게 다정하고 맛있고 든든한 것이었단 걸 요새는 자주 잊는다.
3. 새벽 시간 : 자전거도로 조깅로에서 (by J)
서울을 가로지르는 자전거 도로가 5분 거리에 있다. 엎어지면 코가 닿을 정도라 만만하게 생각하고 동네 친구들과 모여 논 적이 꽤 많았었다. 그 숱한 추억들 중에서도, 술인지 물인지 싶은 500짜리 국산 맥주를 친구들끼리 한 캔씩 마시며 조깅로를 느릿느릿 걸었던 적이 있다. 모두가 바쁘게 놀러 나갔거나 잠시 후 문 닫는 술집 앞에서 파하고 있을 금요일 밤 1시에, 조용하게 이야기 나누고 싶어하는 사람 둘이 어딜 달리 가겠는가.
우린 30분에 한 명씩이나 눈에 띌까 말까 한 어두운 그 길 위에서 그날의 고민을 편하게 털어놓는다. 곧 맞이할 복학에서 오는 기대감,?동시에?엄습하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 전 애인을 향한 그리움 등등… 그런 시시콜콜한 얘기를 하다 지치면 강물이 보이는 아무 바위에나 나란히 앉는다. 그 강물은 딱히 깨끗하지 않고, 그런 대화는 딱히 무슨 답을 내놓지 않지만, 그래도 우린 그 고요한 순간에 살짝 드는 취기를 사랑한다. 술을 만땅으로 마시지 않아도 내 속에 있는 이야기를 가장 왜곡 없이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오롯이 거기에 있으므로.
4. 개강 날 : 간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들과
1~2학년 때는 “개강 파티” 따위를 왜 하는지 몰랐다. 방학 때도 마시고 학기 중에도 계속해서 마시는 걸 왜 개강 기념으로 또 마시지? 솔직히 간을 좀 쉬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뭐 그런 생각밖에 없던 때였으니까. 그러나 이윽고 복학과 휴학이 서로 엇갈리는 5학기쯤을 넘어서니, 이제 개강날은 반가운 얼굴이 보이고, 흥이 나기 시작하는 날이 되었다.
그래서 따로 ‘단톡방’을 파고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동기들이 한두 명씩 붙더니 무려 열댓 명으로 늘었다. 그리고 찾아간 학교 뒷골목은 참 훈훈했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방학 내내 고요했던 동네가 하루 만에 꽐라로 넘쳐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렇지, 나만 쓰레기가 아녔어.
5. 누가 사주는 술 : 그것도 사장님이 (by S)
이런저런 알바를 전전하다 보니 이제는 알바를 할 때 늘 ‘내가 갑이다’라는 생각을 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가끔 힘든 게…
술 중에 제일은 꽁술이라는 게 괜한 얘기가 아니다. 내 돈 들고 술 마시러 왔으면 엄두도 못 냈을 것이 내 앞에 짠 하고 있으니 이 알바를 시작한 과거의 내게 두 손 모아 칭찬을 해 줄 수밖에 없다.?사장님이 그냥 먹고 싶은 거 골라서 마셔! 하실 때 술 냉장고 앞에 옹기종기 붙어서 군침 삼키며 뭘 마실까 고르는 것도 좋다.?어린 시절 아빠랑 같이 슈퍼마켓에 갔을 때, 아빠가 아무거나 하나 골라 와! 했을 때의 기분이 향수처럼 묻어나는 행복감.
늘 연봉깨나 되어 보이던 아저씨들한테 팔던 술을 나도 마셔 본다는 행복감.?그런 소소한 행운이 주는 위로 덕분에, 지친 몸을 끌면서도, 다른 알바랑 재잘대고 깔깔대며 집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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