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소식이 인터넷을 통해 급속도로 퍼지는 오늘날,?사람들은 조금은 섣부르게, 또 조금은 제멋대로 개인의 의견을 포스팅이나 댓글을 통해 드러낸다. 이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사회적 개인에게는 자신을 부정하는 어떤 의견에 대해서든 반박하고 자기를 정당화할 표현의 자유가 있고, 이 권리는 임의로 제한할 수 없는 것이니까.
그런데 요즘, 이렇게 탄생되는 제삼자들의 “의견”이 어떤 진척도 낳지 않는 것을 본다. 오직 희화화, 냉소 그리고 ‘팩트 폭력’만이 양산되고 있다. 인과관계의 종합과 해석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시선을 만들 수 있는 것이 팩트임에도, 그저 데이터 몇 개를 기계적으로 던지며 그것만이 곧 사실이라고 명명하는, 그러면서 철저히 거리를 두고 모든 것을 냉소 섞어 내려다보는, 그런 것 말이다.
폴리스라인 = 맹수 = 가까이 가면 다친다?
이를테면 이런 칼럼이 있다. “지난 해 11월, ‘백남기’라는 ‘농민’이 민중총궐기라는 불법 반정부 집회에서 경찰이 쏜 물대포를 맞았다”로 시작해 “또 선동꾼들의 '사망유희'가 시작됐다”로 끝나는 뉴데일리 기고문인데, 이 기고문의 필진은 자신을 정치외교학과 3학년이자 ‘거룩한대한민국네트워크’ 회원으로 소개하면서 故 백남기 씨를 손님 또는 어린아이에, 경찰을 난로 주인 또는 사육사에 빗대고 있다. 그러면서 말한다. 그러게 왜 가까이 오지 말라는 걸 해서 봉변을 당했느냐고. 그러니 정부의 책임은 없다고.
백보 양보해서, 제삼자인 이 필진의 눈에는,?‘괜히 가까이 가면 → 다치는’ 모든 것은 전부 다 똑같아 보이는 듯하다. 만약 그의 논리력이 이 정도로 허약한 거라면, 충분히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정부가, 경찰이 난로나 맹수와 똑같다는 발상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난로는 의지가 없는 기계이고 맹수는 본능에 의해서만 행동하는 동물이다. 반면, 정부는 국가를 유지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국민의 안전에 대한 보호의 의무가 있으며 어쨌든 사람의 자유의지에 의해 움직이는 조직체다.
그리고 사실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한 개인이 공권력과 시스템 앞에 무력한 것일 텐데, 그래서 지휘명령 체계에 따라 경찰이 직사 살수한 물대포에 고인이 쓰러지기도 하는 것일 텐데, 제삼자인 이 필진은 이 상황을 알지 않고 보지 않고 말하지 않는다. 인과도 맥락도 관계도 없이, 빈약한 논리 몇 개와 “전태일 분신 ‘자살’ 사건, 미선이 효순이, 세월호, 그리고 백남기”의 이름 몇 개를 나열하며, 이만큼이나 거리를 두고 그건 그저 그뿐이라고 말하며.
나열된 이름, 앞뒤 없는 말들 그리고 눈먼 ‘팩트’
지난해 제1차 민중총궐기가 진행될 때 故 백남기 농민을 잘 알지 못하던 제삼자들은 지금 너도나도 그에 대해 이걸 안다 저걸 안다 하면서 제각기 다른 식으로 호명하고 있다. 시위꾼, 범법자, 전문 선동가까지. 수도사, 민주화 운동, 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 같은 그의 지난 이력들은 오로지 민중총궐기 시위라는 하나의 초점 아래 전부 흐릿해지고 있고, 그 시위가 현 대통령의 ‘수매가 인상 공약’ 불이행에 대한 항의였다는 기본적인 목적 역시 삭제된 채로 말이다.
그 제삼자들은 말한다. 사람 하나 죽었다고 또 대수냐, ‘꿘’이 보기 좋게 명분 하나 잡았다, 딱 세월호 꼴이다, 그러게 왜 넘지 말라는 폴리스 라인을 넘냐 등등. 역시 백보 양보해서, 그들의 사회적 상상력과 사고력에 따라서는?300여 명이 하루아침에 바다로 가라앉은 세월호 사건보다는 그 무게가 가벼워 보일 수도 있겠다. 사실이 어떻든 또 다른 ‘운동’을 벌이기 위해 운동권이 전략적, 정치적으로 이 희생을 이용하고 있다는 의혹을 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정말로, 영상 속 빨간 점퍼 남성의 펀치 때문에 위독해졌다고 믿거나.
그러나?그 생각 안에 정부가 폭력적으로 국민을 탄압했고, 그로 인해 한 인간의 생명이 끝이 났다는 인과는 없다.?故 백남기 씨가 농민이고, 시위 참가자이기 전에 한 명의 사람이며, 그가 쓰러져 있을 때조차도 경찰이 그를 향해 직사 살수를 끊임없이 가했다는 사실 역시 찾아볼 수 없다. 이쯤 되면, 의학적 소견과 별개로, “사실상” 이것 때문에?고막이 나가고, 뇌진탕이 왔다고 말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제삼자들은 이렇게나 개연성이 있는 논리적 정황 추론조차 완강하게 거부하며, “팩트”에 기초한 “객관적” 판단만을 되뇌인다. 물론 그 말들이 고인의 사후 명예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좋을 정도이다.
무조건 불쌍하게만 보자는 것이 아니라
다시 강조한다. 법에 저촉될 수준이 아니라면, 무슨 이야기를 하든 그건 개인의 자유다. 꼭 “사람 냄새” 나는 연민과 동정의 ‘감성팔이’를 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다만, 자신의 말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그 방향이 적절하긴 한지, 혹시 아무 데도 향하고 있지 않은데 폭발력만 높은 오발탄처럼 던져지고 있는 것은?아닌지 되돌아보자는 말이다.?우린 어쨌든 결국 제삼자지만, 누구도 문자 그대로 당사자와 완전히 분리된 제삼자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한 개인이 정말로 아무 힘이 없는 때가 있고, 어떤 관계가 가해자-피해자의 관계일 수도 있으며, 몹시 공정해 보이는 게임이 실은 한쪽으로 잔뜩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열리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 상황과 맥락을 조금도 알아보지 못한 채 아무 때나 앵무새처럼 ‘개인의 노력’과 ‘피해자 탓’ 그리고 ‘불법 폭력 OUT’을 한결같이?읊어대는 모습은, 이토록 모두가 공평하게 불합리를 당하고 있는 세상에서, 그 얼마나 옹졸하고 모자라 보이는가 말이다.
김정원의 이름으로 나온 최근 기사 (모두 보기)
- 일일드라마 ‘여의도 사람들’ - 2017년 5월 8일
- [대마 비범죄화론] ② 이센스가 어긴 것은 20세기의 법이었다 - 2016년 10월 24일
- [가지는 취미를 갖자] ② (가성비 짱짱의) 스티커 - 2016년 10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