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원대하나 별 능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처음 일을 시작할 때, 흑역사가 마구 생기는 법이다. 방송사라고 별반 다를 것 없다. 자본도 인력도 별로 없지만 어떻게든 정해진 방송시간을 채워야 하는 입장에서는, 나중에 돌이켜 보면 낯부끄럽기 짝이 없는 것들을 막 만들어 내보내야 하는 시기가 있게 마련이다.
10년이나 살아남는 데 성공한 tvN의 공적을 기리며, 존경을 담은 마음으로 tvN이 살아남기 위해 했던 흑역사를 알아보자. 중요하니까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이 이야기는 순전히 10년을 존속한 방송사에 존경을 표하기 위해 기획되었으며, 그러므로 여러분도 “와! 이렇게 낯부끄러운 과거가 있어도 잘 버티다 보면 어떻게든 되는군!” 하는 교훈을 얻어 용기백배하시길 바란다.
흑역사 1: 오컬트와 성생활 전문 채널
처음 시작하는 케이블TV 채널은 어디나 지명도를 끌어올릴 방법을 고민한다. 그런데 ‘엔터테인먼트 채널’이라는 모호한 정체성을 가진 tvN은 어떤 컨텐츠로 이를 돌파할 수 있을까? 개국 초기부터 기존 방송사 급의 예능이나 드라마를 제작하는 건 불가능하고, 그렇다고 마냥 타 방송사 컨텐츠만 계속 송출할 수도 없는 노릇.?tvN의 선택은 오컬트와 성생활 컨텐츠였다.
개국 때부터 시작된 ‘리얼스토리 묘’는 이를 대표하는 프로그램이었다.?흔히 이 프로그램을 SBS의 ‘그것이 알고싶다’와 겹쳐서 생각하는데, ‘리얼스토리 묘’는 전문가의 분석이나 체계적인 줄거리가 없었다. 이건 그냥 무작정 카메라를 들고 가서,?자칭 전문가나 ‘현장’에 간 다음에, 거길 한 번 이상야릇하게 찍어 보여주고, 다음 코너로 넘어가기가 일쑤였다. 불법 성매매 현장,?기를 쏜다는 사람, 신 들린 아이들, 이름의 소리가 운명을 결정한다는 ‘파동성명학’ 전문가… 총체적 난국이었다.
이런 프로그램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비키니 차림의 출연자들이 팀을 나눠 ’수위 높은’ 몸게임을 벌이는 ‘tvNgels’는 2006~2007년 동안 3개 시즌이나 제작되었고, 그 내용들은 요즘 그렇게 욕을 먹고 있다는 ‘아재쇼’ 못지않게 야하기 짝이 없었다. 2008~2011년에 편성된 ‘심령솔루션 엑소시스트’는 퇴마사, 무속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그들의 활약을 보여줬는데, 가면 갈수록?대역 배우를 써서 찍은 페이크 다큐라는 의혹을 받았다.
오죽하면 한때 “어린이가 SBS에 출연하면 사랑 못 받고 자란 애가 되고, tvN에 출연하면 귀신 들린 애가 된다”는 말이 퍼졌을까.?주간지 한겨레21의 연예면은 이 방송국을 반농담으로 “연예오락 (막장)전문채널”로 인증하기도 했다.?지금이야 고오급 성인 유머를 구사하는 최첨단 트렌드의 선봉장인 SNL코리아로 품위를 지키고 계시는 듯하지만, 10년 전만 하더라도 그들이 어땠던가는, 흠흠 과연 글쎄.
흑역사 2: 방송국 < 방송 프로그램 <<<<< 넘사벽 <<<<< 출연자 인지도
2009년은 여러모로 tvN의 도약기였다. ‘재밌는 TV 롤러코스터’의 코너인 “남녀탐구생활”이 있었고, ‘막돼먹은 영애씨’는 시즌 5, 6에 들어서며 고전으로 자리잡았다. 이때 앵커 백지연이 영입되어 ‘백지연의 피플 인사이드’가 런칭되기도 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이때 가장 인기 있고 잘 알려진 것은 무엇이었던고 하니… ‘화성인 바이러스’였다.
뭔가 비범한 사람들을 찾아가서 취재한다는 측면에서는 SBS ‘세상에 이런 일이’와 비슷해 보였지만, ‘세상에 이런 일이’가 “아~ 세상에 이런 일이나 저런 사람도 없진 않겠구나” 할 정도였다면, ‘화성인 바이러스’ 속 등장인물들은 정말이지 지구에서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들만 콕콕 집어서 스튜디오와 네티즌들 앞에 나타났더랬다.?“초등학생 딸을 재벌가에 시집보내려고” 훈련시킨다는 어머니부터 란제리 룩으로 돌아다니는 괴짜 패셔니스타, 절대 술에 안 취하는 사람, 심지어는 H컵 가슴을 가진 여성도 ‘화성인’이라고 나왔다.
이런 출연자의 방영분은 인터넷 커뮤니티의 떡밥이 되기 충분했다. 사람들은 출연자에 대해 신나게 떠들었다. 충격을 받았다거나, 때로는 당당해서 좋다며 응원하거나, 가열차게 비판하거나. 이러다 보니?상황은 점차 우습게 돌아갔는데, ‘힘쎄고 강한’ 출연자가 나올수록 ‘화성인 바이러스’의 인지도, 그리고 tvN이라는 채널의 인지도가 올라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tvN은 이후 속편인 ‘화성인 X파일’, ‘화성인 vs 화성인’까지 제작하였지만,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 같던 “화성인 트릴로지”는 2013년을 끝으로 완전히 막을 내린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출연자가 자신의 쇼핑몰을 홍보하기 위해 가공된 컨셉으로 등장했다는 의혹, 제작진이 “악마의 편집으로 막장 컨셉을 만들어냈다”라는 출연자의 폭로 따위가 한참 전부터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실은 뭐냐고? 김성주나 김구라만이 알고 있다.
흑역사 3: 정말 그냥 아예 사라져 버린 ‘시사’ 프로그램들
2010년 들어서서 tvN은 시사 컨텐츠에 접근한다. ‘백지연의 끝장토론’은 중요한 사회이슈를 진중하게 접근하는 프로그램이었으나, 기존의 토론 프로그램과 달리 빠른 진행, 토론 내용을 정리하는 자막, 현장 관객들의 찬반을 즉석에서 묻는 파격적인 형식을 적용하여 예능 같은 느낌을 만드는 데 성공한다. 2011년에는 사회풍자적 연극/영화감독인 장진을 영입하여, 미국의 풍자 코미디 프로그램 ‘SNL코리아’를 런칭한다.
2012년에 그들은 우연찮게 성공했다. 4월 총선과 12월 대선이 겹쳤고, ‘나는 꼼수다’를 통해 정치/사회 소재 예능의 수요가 급증한 시기였는데, 하필 마침 지상파 방송국들은 친정부적 보도만 일삼거나 아예 시사 소재를 포기해 버렸던 것. 그래서?‘끝장토론’은 이상돈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이 토론 도중 퇴장하는 모습을 여과 없이 방송할 수 있었고, ‘SNL’은?‘여의도 텔레토비’나 신동엽이 홍석천에게 ‘역관광’당하는 미러링 풍자 코미디를 선보이는 정점을 찍는다.
그런데 이렇게 잘 나가던 시사 오락과 풍자가… 2013년부터 자취를 감춘다.?이유는 꽤 허무하다. 방송통신위원회가, “시사교양 프로그램을 할 수도 있다고 했지, 누가 너네 같은 딴따라 채널더러 백날 천날 정치 시사 가지고 방송 만들랬어? 너네가 무슨 뉴스 채널이야?” 하고 제동을 걸기 시작한 것이다. 그 뒷이야기가 실로 코미디 같다. ‘끝장토론’은 최일구 앵커를 차기 진행자로 발표한 직후 편성이 무제한 연기되었고, ‘SNL코리아’도 장진 하차 이후 시사 소재가 완전히 끊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박근혜 정권의 입맛에 맞지 않았던 것일까.?(#그런데_최순실은?) 아니면 모그룹인 CJ의 이재현 회장이 탈세/횡령/배임 혐의로 구속될 상황에서 몸을 사렸던 것일까. 아무튼 tvN이 10주년을 맞아 정리한 역대 프로그램 목록에서 ‘백지연의 끝장토론’은 등장하지 않았다. 난 분명히 그 시절을 기억하는데, 그들에게 그 기간은 그야말로 흑역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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