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는 취미를 갖자] ① (담배 없는) 파이프

빈티지하고도 지적인 멋을 부리고 싶은 당신, 파이프를 가져라.

내가 파이프를 가지는 이유

1970년대까지만 해도 파이프 담배는 흔했으며, 그럼에도 꽤 매력적이었다. 직장, 카페, 음식점, 기차의 앉은 자리에서 가만히 파이프를 들고 책이며 신문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들은 지식인으로 묘사되곤 했다. 웬만한 궐련 한 갑이 5천 원을 훌쩍 넘고 그나마 흡연석마저 없어진 지금, 그들이 풍겼던 멋을 재현하는 방법은 없을까? 연극 소품으로 필요해서 우연히 구입했던 작은 물건이 바로 열쇠였다. 파이프가 그것이다.

신문을 읽고 있는 모네

르누아르, “신문을 읽고 있는 모네”

그래서 가끔씩, 오랜 시간 앉은 자리에서 지적 노동에 집중할 수 있도록 흥을 돋우는 순간이 필요할 때, 글자 하나하나를 짚어가며 이해하는 여유를 부리고 싶을 때 파이프는 꽤 매력적인 선택이다. 흡연자가 아니더라도 오히려 괜찮다.?카페나 도서관, 사무실?같은 노동의 장소에 파이프를 들고 가자. 이것은 훌륭한 휴대용 장난감이고, 당신과 당신의 작업 환경에 빈티지한 멋을 가져다주는, 그래서 아주 탁월한 취미다.

 

파이프를 가지고 즐기는 방법

1. 숨을 마시고 뱉으며 마음 고르기

양질의 지적 노동은 차분한 마음가짐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모두가 가부좌를 틀고 요가를 할 수는 없는 노릇. 이때 파이프는 요긴하다. 파이프를 입에 물고, 깊게 숨을 빨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구조 자체가 넓은 구멍으로 들어오는 공기를 좁은 관으로 천천히 마시도록 설계된 도구이므로, 그냥 숨을 쉬는 것보다 더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공기를 마실 수 있다.

지적 노동의 한가운데에서 숨을 길게 내쉬어야 하는 순간에도 파이프는 좋은 구색을 갖추어준다. 입에 물려 있던 파이프를 살짝 쥐어 입에서 떼고, 담배 연기를 내쉬듯 천천히, 품위 있게 뱉는다. 담배를 태우고 있지도 않은데?그러고 있는 모습은 어딘가 없어 보일 것 같다고? 장담하는데,?모니터와 교재 앞에서 땅이 꺼져라고 한숨을 푹푹 쉬고 있는 것보다는 덜 불안정해 보일 것이다.

가루담배 파이프 구조 각부명칭

2. 가지고 놀며 초조함을 달래기

파이프를 한 번이라도 손으로 쥐어 본 적이 있다면 알겠지만,?파이프는 다양한 방식으로 계속해서 가지고 놀기에 적당한 도구이다. 볼(bowl)은 손을 조그맣게 오므려 쥐면 딱 맞게 되어 있고, 생크(shank)는 때로는 펜을 쥐듯, 때로는 얇은 책을 쥐듯 다양한 모양으로 잡을 수 있다. 버튼(button)은 입에 물고 있는 부분인데도 그다지 힘들지 않은데, 어떤 것들은 무려 인간의 구강 구조를 연구해서 설계되기 때문이다.

열 손가락을 키보드 위에서 정신 없이 움직인 다음 잠시 휴식하고 싶을 때는, 파이프의 볼을 쥐고 이리저리 굴려 보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서 초조할 때는 버튼을 잘근잘근 씹듯이 물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다가 다시 한숨을 쉬고 싶을 때는, 자연스럽게 입에서 떼어 들고 후, 내뱉으면 그만이다.?그 모습을 더럽다거나 변태적이라고 할 사람은 없다. 당신의 코디 상태에 따라서는 힙스터로 보일 가능성이 있을지언정.

조현익 파이프

로렌조 가든 스트롬볼리 G10 파이프 17,000원.

3. 그냥 근처에 놓아두고 멋 부리기

아니, 다 필요없고, 그냥 놓아두어 보라.?펑퍼짐한 종이묶음, 무겁고 둔탁한 전자기기, 얍살한 필기구와 전선으로 가득찬 당신 책상 위에 가벼우면서도 단단하고 중후한 느낌의 파이프 하나를 올려두고 아무 작업이나 해 보라. 당신 자리의 느낌은 어딘가 달라질 것이다. 마그리트가 파이프를 그려 놓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이름한 이래 지금까지, 파이프는 그렇게나 친숙하게 낯선 물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파이프가 놓인 당신의 작업 환경, 그리고 그 안에서 일하는 당신을 은근히 주목할 것이다. 누군가에게 당신은 (워너비) 힙스터일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정말로 연초를 사랑하는 헤비 스모커가 되어 있을 것이다. 자, 이제 이런 남들의 시선쯤 상관하지 않는 사람이 되자. 익숙한 무게감과 형체의 물건들만 놓인 세상에서, 당신만의 정취와 아이덴티티를 확보하는 데 파이프만한 것은 흔치 않다.

 

파이프를 가질 수 있는 곳

가루담배파이프 로렌초가든 G10

ⓒ 파이프스토리

파이프에 처음 입문한다면 다양한 종류의 파이프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오프라인 전문 매장을 찾는 것이 좋다. 파이프용 ‘가루담배’를 파는 매장을 검색하면 된다. 입으로 무는 대롱과 담뱃잎 넣는 입구의 모양, 마감처리와 질량에 따라 가격이 1만 원대에서 20만 원대까지 천차만별이므로, 마음에 드는 물건들의 가격을 확인한 다음 아주 약간 더 사치를 부린다는 느낌으로 선택해 구매한다.

살펴볼 요소는 다음과 같다. 우선 조형에 따른 휴대성과 그립감을 확인하고, 무게, 대롱의 길이, 담뱃잎 넣는 입구의 볼록함 정도 등을 고려해야 한다. 가격이 낮은 모델은 별도의 보관함이 없는 경우가 많으므로, 본인의 가방 주머니 등에 넣어서 들고 다닐 수 있는 모양과 견고함을 갖고 있는지 확인하자.

관리도 간단하다. 그냥 잘 닦아 주면 된다. 제대로 세척하고 싶다면 파이프 취급점에서 클리닝액과 청소솔을 구해서 쓰면 되지만, 당신이 이 파이프로 굳이 가루담배를 흡연할 필요는 없으니 사용법까지는 다루지 않겠다. 중요한 것은 파이프를 들기 시작하는 것이다.?일단 파이프를 하나 사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오직 그걸 당신의 멋으로 바꾸는 일만이 남아 있다.?그 물건은 한 번 사면 두고두고 자기만의 것이 되어 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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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익

조현익

Twenties' Timeline 디자이너. 글 써야 할 때 그림 그리고, 그림 그려야 할 때 글 쓰는 디자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