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그 아이에게 ‘노력하라’ 하지 못하겠다

노력도 상황 봐 가면서 하는 거지, 이 마당에?

아무 노력도 하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실 나는 그 누구보다 노력의 신봉자다. ‘노력하지 않고 결과를 얻은 자’에 대한 사회의 시선이 가장 날카로워져 있는 이 시점에도 여전히, 나는 노력이라는 가치가 상대적으로 가장 공정하고 정당한 것임을 믿는다. 다만 나는 위험하게도 ‘열심히 노력하는 자’가 들으면 별로 좋아하지 않을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이 사회에 만연한 ‘노력 신화’의 비판이 바로 그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이것을 강력히 반대한다.

신화 으쌰으쌰 뮤직뱅크 1998년 중단을 거부할 때 노력은 그만큼의 결실을 맺어준다

솔직히 노력 그 자체는 엄청 멋있는 것이다. ⓒ KBS 뮤직뱅크, 1998년 신화 무대

여기서 말하는 노력 신화란, 노력을 최선으로 생각하며 노력을 통해 얻은 결과는 이론의 여지 없이 공정하고 합당한 것으로 여기고, 노력하지 않는 자의 게으름을 오직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사고 체계이다. 노력 신화에 따르면 노력만이 최고의 선이 되며, 노력하지 않은 사람의 사회적 탈락은 당연한 것으로 간주된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이것이 실제 세계에 들어와 적용되어도 과연 그럴까?

우선 내가 알고 있는 두 아이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강남 8학군”에 거주하는 초등학교 6학년의 A, 그리고 임대아파트가 들어선 산동네에 사는 초등학교 6학년 B를 소개한다.

 

프로그래밍을 배우는 6학년 vs. 학교 끝나면 그냥 노는 6학년

A는 열심히 노력하는 친구라고 할 수 있다. 영어 학원을 두 군데 다니며 토플 시험을 준비한다. 어릴 때 영국에서 3년을 살다 온 덕에 영어가 꽤 유창해서 영어 말하기 대회를 준비하기도 한다. 대기업 임원이라는 친구 아버님의 프로그래밍 동아리에서 휴대폰 앱 개발을 배우고, 주말 아침에는 농구 동아리에 나가서 운동 실력도 쌓는다. 이러다 보니 1주일 중 온전한 자유 시간은 토요일 하루 1시부터 4시까지의 딱 3시간이다.

힘들지 않느냐고 물어 보았다. 한숨을 쉬며 힘들다고 한다. 그러다가도 금방 또 하는 말이, 친구들도 다 비슷하게 살고 있기도 하고 “어릴 때부터 이렇게 살아와서” 적응돼 있단다. 어제도 새벽 1시에 잠들었다면서.

아파트에 밀려난 달동네

ⓒ노컷뉴스

B는 거의 노력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취미는 게임이고, 그 게임마저도 하지 않을 때는 그냥 놀이터나 주변을 배회하며 특별히 하는 것 없이 시간을 보낸다. 그래서인지 영어 실력은 더듬더듬 문장을 겨우 읽는 정도다. 잘 모르는 문장은 그냥 한글로 영어 발음을 그대로 적어서 외운다. 중학교 가기 전까지 영어 교과서 본문을 읽을 정도는 되어야 할 텐데 걱정스럽다. 나와 만나는 시간에는 늦거나 빠지기가 일쑤다.

주로 하는 게임이 뭐냐고 물어봤다. 요새는 마인크래프트에 빠져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가끔씩은 친구들과 함께 ‘게임방송’을 하기도 한다고. 문득, B가 사는 동네의 문방구에 놓인 ‘도타 장난감 뽑기’가 생각났다.

고3 교실

큰 예외가 없다면, A는 수능을 잘 칠 것이다. 애초에 그는 이미 진행된 꾸준한 자기계발 덕분에 자기 적성을 잘 알고, 변호사가 된다는 ‘꿈’이 확고하다. 그러니 정시를 ‘올킬’하든 이런저런 스펙을 살려 수시모집을 붙든 해서 명문 대학에 충분히 합격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보답받아 마땅할 정도로 노력한다. 숙제를 한 번도 빠뜨린 적이 없을 정도이므로.

문제는 B다. B는 수능 준비를 얼마나 하게 될까? 아니, 그걸 하긴 할까? 할 수는 있을까? 그는 아마 앞으로도 공부에 큰 관심이 없을 것이며, 지금처럼 친구들과의 게임으로 시간을 보낼 것이다. 원하는 대학교에 가기 위해 밤새 공부하는 B의 모습은 상상하기 힘들다. 사회 계급의 색안경을 끼고 보지 말라고? 아니, 오히려 B를 두 눈으로 자주 봐서 하는 말이다. 책상 앞에 앉는 것이 B에게는 노력의 문제가 아니라 고문인 것이다.

 

노력이 가능한 조건 vs. 불가능한 조건

훗날 A가 B보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위치에서 높은 연봉과 좋은 대우를 받으며 살아간다고 가정할 때, 그건 그럴듯하다. B가 밤새 게임을 하고 친구들과 놀며 현재에 충실했을 때, A는 졸린 눈을 비벼가며 토플 단어를 외우고 ‘쎈’을 풀며 미래를 준비했을 테니까. 그렇다고 A가 부모의 빽이나 부정한 방법을 동원할 것 같지도 않으니까. 미래의 성과를 위해 현재의 쾌락을 유보한 A가 B보다 성공한 삶을 사는 것이, 노력의 정의를 추구하는 이 사회에서 뭐가 문제가 될까?

뒤주책상 스터디큐브

모두가 ‘뒤주책상’이라 비웃었던 이 시설물은 사실 245만원에 육박하는 고가품이다. ⓒ스터디큐브

문제는, A도 B도 모두 그저 뛰어놀기 좋아하고 게임에 대해 아는체를 늘어놓는 6학년 초등학생일 뿐이라는 점이다. 두 아이의 결정적 차이는 오직 주변에만 있다. A의 주변에는 고소득 전문직의 부모님, 평균 5개소 이상의 학원을 다니는 친구들과 서재로 꾸며진 공부방이 있는데, B의 주변에는 병에 시달리는 부모님, 학교 끝나면 게임만 하는 친구들, 자기 방을 요구하기에는 좁은 집이 있다. 여기서 두 아이는 그대로 두고 서로의 환경으로 쏙 바꿔준다면? B는 책상에 앉기 시작하고, A는 즉시 게임방송을 할 것이다. 장담할 수 있다.

노력 신화의 가장 큰 맹점이 여기에 있다. 노력을 할 수 있는 주변의 조건이 분명히 있는데, 노력을 전부 개인적인 것으로만 여긴다는 점이다. 우리는 어떤 결과를 보면서 개인의 자질 혹은 개인의 나태만을 말한다. 아무도 노력할 수 있는 환경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는다. 단지 “주변 환경 탓”을 하는 이들에게 들려주기 위한 반례들만이 강력하고 다양할 뿐이다. 왜 다들 그런 이야기 한 번쯤 들어보지 않았는가? 낮에는 어디 가서 일을 하고 밤에는 공부를 해서 만점을 받고 어디에 합격해서 뭐가 됐다는 그런 얘기.

호레이쇼 앨저 저서

미국에는 호레이쇼 앨저 신화(Horatio Alger Myth)라는 것이 있었다. 누구나 노력(get ahead)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인간은 생각만큼 뛰어나거나 자율적인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성장 과정에서 보고, 듣고, 만지고, 느낀 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신도 모른 채 내면화하여 일종의 사고방식과 행동 양식을 형성한다. 어릴 때부터 주변에서 수능 이야기를 듣고 자란 A에게 전해지는 시험의 무게와, 어릴 때 놀이터에서만 시간을 보낸 B가 받아들이는 시험의 무게는 같을 수가 없다. 어쩌면 인간이란 각자의 아비투스의 총합에 불과하여, 상속받은 취향과 선택의 방법으로만 이루어진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A가 공부를 하고, B가 공부를 하지 않는 이유는 단지 거기에 있다. ‘노력’도 주변 환경의 족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노력 신화’는 이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노력할 수 있는 조건과 환경은 너무나도 무작위적이고 불평등하게 분배되어 있는데, 노력의 가치를 받들어 모시는 이 사고방식은 열악한 환경을 극복해낸 일부의 사람들을 반례로 들어 이 상황으로부터 눈을 감는다. 노력이 불가능한 환경마저도 노력으로 극복하라는 것이다. 누군가는 해냈지 않느냐는 이유 아닌 이유로.

 

“돈도 실력이야” 망언 앞에서 할 말이 있으려면

달그닥, 훅. 이 나라를 휩쓸고 있는 어떤 ‘노력’의 비결이다. 남들은 출석을 꼬박꼬박 하고 밤을 새며 과제를 해야 겨우 얻어가는 점수를, 어떤 학생은 메트로놈 하나를 가슴에 품었더니 쉽게도 획득했다는가 보다. 내가 정유라라는 승마술 전공자에게 화가 나는 부분은 ‘메트로놈’이 아니다. 따지자면 이건 차라리 구보를 잘 하려고 나름대로 애써 터득한 요령인 듯하므로, 이 노력 자체를 뭐라고 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화나는 부분은, 막장 드라마의 대사처럼이나 노골적인 “돈도 실력이야, 너희 부모를 원망해”라는 독백이다.

정유라 페이스북

이것은 그러니까 노력할 수 있는 환경이 없으면 자기의 “노력”에 토를 달지 말라는 소리다. 온갖 인맥, 권력, 부정과 비리, 천문학적이고 은밀한 지원금 위에서 이루어진 노력이었지만, 어쨌든 자기는 ‘달그닥 훅’ 했으니까 ‘아닥’하라는 말이다. 심지어 이것은 노력 신화에 따르면 아주 틀린 말이 아니다. 그 신화의 신자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운도 실력이다.” “저런 집안에서 태어나도 안 될 놈은 안 되더라.” “아무튼 자기가 뭔가 열심히 했으니까 저 정도 됐겠지?”

아니. 노력의 가치를 믿는 나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나 밤을 새고 머리를 쥐어짜내야 겨우 얻을 결과를 인맥이나 권력을 이용하여 가져가는 것은 공정하지도 정당하지도 않다. 그래서 노력으로 쳐 줄 수가 없다. 이걸 노력의 범주에 넣었다간, 몇 년 뒤에는 교내 프로그래밍 경진대회에서 상을 받은 A가 “좋은 친구 아버님과 잘 알고 지내는 것도 실력” 어쩌고 하는 소리를 B가 듣고 있어야 할 판이다. 무리한 가정 같지만 꽤 가까운 현실이다.

이화여대 대자보 어디선가 말을 타고 있을 너에게

당장 이화여대가 정유라의 ‘채플 결석’에 분노한 것이 바로 이런 이유였다.

그래서 노력 자체는 비난할 수 없되 노력 신화는 폐기해야 한다. 평범한 주변 환경에서 할 수 있는 보통 수준의 노력이 있고, ‘비선 실세’ 같은 이들이 동원하는 환경에서의 노력이 따로 있다. 이 모든 노력들을 개개인의 성과라는 동일선상에 몰아붙여 비교하는 노력 신화가 끝나지 않는 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A를 만난 다음날 내가 B에게 가서 염치 없이 “공부 좀 열심히 하라” 잔소리할 도리는 없다. 지난 주 집회 관련 소식을 보니,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건 아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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