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겠고, 일단 증빙서류 제출하셔야 합니다”

동아리 총무가 말한다. ‘입증’에 대한 날카로운 추억.

* 본 기사는 익명을 요청하신 구독자 분의 분노에 찬 제보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경북에 거주하시는 모 구독자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어쩐지 연말이 불길하더라니

연말이 다가왔다. 우리 학교는 매년 이때쯤이 되면 각 동아리별로 ‘동아리장’과 ‘총무’가 중심이 되어 조용한 전쟁을 치른다. 알아보기도 힘든 영수증 쪼가리들을 열심히 모아, 장부를 정리하고 서류를 꾸미는 것이다. 이 정리를 어떻게 끝내느냐에 따라 그 다음 해의 동아리 활동이 편해지기도, 힘들어지기도 한다. 그러니 대충 쓰면 안된다.

총무들이 목숨처럼 여겨야 하는 영수증

이렇게 열심히 쓴 서류는 학생회비 지출 예산에 있는 “동아리 활동 지원금” 선정과 연결된다. 금액이 한정되어 있는 이 지원금을 얼마라도 더 받으려면 '저희에게 그걸 주시기만 하면 정말 알차고 풍성하게 최고의 가성비로 활용할 자신이 있으며 지금까지도 그래 왔습니다’ 하는 점을 증명하는 자료가 필요한 것이다.

이런 행정적인 업무만 해도 산더미인데, 작년에는 동아리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충격적인 통보를 받았다. 학교 측에서 실효성 있는 내년 활동계획을 제출함과 동시에, 학기 말에는 실제 활동 내용을 제출하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실적? 제출? 증빙? 잠..잠깐만요...

그냥 내면 되는거 아니냐고? 아주 약간의 문제가 있다. 정기적인 봉사를 진행하는 곳을 포함하여, 우리 동아리가  좀 더 집중하는 것은 매년  '긴급한 손길'이 필요한 곳들이다. 어느 마을에 수혜가 났다거나, 혹은 수확을 코 앞에 두고 일손이 부족하다거나. 당장 손길이 필요한 곳에 누구보다 빨리 달려가서 고단함을 나누고 일손을 거드는 것이야 말로 우리 동아리에서만 느낄 수 있는 큰 보람중 하나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하지만 학교측의 요구대로 '7월 4주차에 모 양로원에 가는 일'을 계획하여 사전제출했다고 하자. 그런데 마침 폭우가 내려서 긴급한 손길이 필요한 곳이 발생했다? 슬프게도 우리는 그곳에 가지 못한다. 이미 제출한 계획을 수정하기 위해서는, 학교측의 규정에 따르면 봉사처의 협조공문을 시작으로 인원편성표 및 물자 사용에 대한 계획서 등등 수십가지의 서류를 다시 제출해야 한다. 그리고, 기다려야 한다. 확인할 때 까지. 하염없이. 계속.

서류 확인하셨습니까! 와따시 기다립니다!

지원금을 못 받을 때 못 받더라도 이러한 사정만큼은 참작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현재 동아리가 무엇을 했으며, 그 와중에 이러저러한 상황이 있고, 따라서 우리가 뭘 할지가 확실하게 예정할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활동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봉사라는 동아리 특성을 이해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느냐ㅡ고 물었다.

규정상으로는 월간 계획이랑, 분기 계획, 그렇게 두 가지로 분류해서 내야 하고, 규정상 월간은 최소 1건에서 최대 3건까지, 분기은 최소 4건에서 최대 15건까지 뭘 할 거라고 규정상 해 주셔야....

...하지만 학생지원팀에서는 규정을 영어듣기 테이프처럼 반복할 뿐이었다.

진심 로봇이랑 대화하는 줄.

봉사를 대하는 우리들의 자세

봉사란 즐거운 일이다. 즐거워야 하지만, 또한 일다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봉사활동이든 반드시 꾸준히 규칙적으로 실행되어야 한다. 즐겁지 않은 봉사활동은 자학적인 무급 막노동이고, 제대로 일하지 않는 봉사활동은 민폐일 뿐이며, 1회에 그치는 봉사활동은 차라리 하지 않는 것보다 나쁘다.

우리 동아리가 신입 멤버들에게 가장 먼저 가르치는 것들이다. 동아리 수준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나름 철저한 방침과 요령으로 봉사활동과 실천적 사회복지를 훈련하고 있다는 긍지가 있었다.

진지함이 없는 자리에 찾아오는 것은 생색뿐이다 ⓒMBC

하지만 봉사 동아리를 밖에서 보면 속 편하고 대중없는 활동으로 비치는 듯하다. 내내 놀다가 적당히 아무데나 가서 연탄 좀 나르고 사진 찍고 돌아오는 줄로 아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동아리 대표회의에 가면, 뭔가를 해내거나 만들거나 받아와서 스펙에 도움을 주는 다른 분과는 할 말 다 하는 데 비해 유난히 ‘봉사·종교분과’는 기가 죽어 있었다. 왜지? 우리도 노는 건 아닌데.

그 와중에 찾아온 것이 '실효성 있는 내년 활동계획 제출' 이었다. 그래. 기왕 이렇게 된 것, 우리도 보란듯이 증빙해주마. 어디든 우리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찾아간다면 그것이 또 보람 아니겠는가. 그 과정에서 힘써 추진한 일이 모 기관과의 협력기구 체제였다.

덤벼라! 행정서류!

그 기관의 정규 봉사단체로 등록을 하면, 행정적인 증빙을 통해 그놈의 '활동 실적'이라는 걸 편하게 확인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였다. 그리고 제휴가 시작되었다. 처음은 나쁘지 않았다. 정말이다.

하지만 올해 중순부터 기관 측에서 “특별 협력”을 요청하며 우리를 엉뚱한 곳으로 ‘임시 투입’하기 시작하더니, 올해 중순부터는 이것이 거의 일상화되어 우리는 졸지에 이 기관의 ‘5분 대기조’가 되었다. 경기가 어려워지면서 일반 봉사자들이 너무 많이 이탈했고,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봉사 수요가 감당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통보를 들은 다음, 나와 동아리장은 시내에서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

좋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견뎌야 할 일이 많았다. ⓒ웹툰 '미생'

“실효성 있는 활동 계획”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번 가을/겨울은 정말 롤러코스터 같았다. ‘남자를 요청했는데 여자가 왔다, 인원 바꿔 달라’ 하는 클레임만도 벌써 두 번이나 받았고, 확인 절차가 자꾸 꼬이는 바람에 기껏 방문한 현장에서 “뭐 하러 왔냐, 연락 못 받았다” 박대를 당한 멤버를 정확한 곳으로 급히 다시 보낸 사례는 손으로 꼽을 수가 없다. 생각지도 못하게 현장에서 구입해야 했던 장갑, 비닐과 같은 지출은 차라리 사소할 정도였다.

물론 불합리한 상황이다. 하지만 그 요청을 거절하지 못한 까닭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우리의 활동을 "행정적으로 증명받을 수 있는” 것이란 고작해야 이런 방법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기존까지 해오던 것 처럼 능동적인 봉사계획을 만들 수 없는 서러움과, 일방적으로 누군가에게 부림 당한다고도 보일 수 있겠다. 하지만 동아리의 존속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라고 믿고 싶었다.

너무 다양한 상황이 벌어져서일까? 멤버들, 특히 이제 갓 들어온 신입들은 오히려 이 혼란과 허탈함을 즐기고 있었다. 다들 인내심이 좋은 건지 적응력이 좋은 건지 그냥 별 느낌이 없는 건지, 이리 오라면 오고 저리 가라면 가고 뭘 빨리 사 오라면 사고… 너무 태연하게, 그리고 즐겁게 봉사하는 것이다.

차라리 누구에게든 벌컥 화를 내며 따져 주면 나았을지도 모르겠는데, 다들 너무나 배운 대로 봉사활동을 즐겁게 규칙적으로 일답게 해 주니,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오히려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어떤 일은 사람때문에 견디는 경우도 있다

'당사자가 스스로 필요를 세팅하는' 지원사업이라는 말

그리던 와중, <2016 청년허브 컨퍼런스 : 삶의 재구성 SEASON3>에 다녀왔다는 친구에게서 전해 들은 이야기가 생각난다. 거기서도 마침 각종 청년 활동 지원 사업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는데, 협동조합 성북신나의 사무국장이라는 분이 그랬단다.

청년 30명에게 그냥 5만 원씩을 줘 보니, 그 30명 중 5만 원을 똑같이 쓴 사람이 없었다고. 즉, 기존 지원사업이 담아내지 못하는 당사자 스스로의 필요가 분명히 있고, 지원금을 받을 사람이 자기의 그 필요를 스스로 세팅할 수 있어야 진정한 청년 지원 사업이라 할 만하다고 말이다.

물론 그 자리에서 다른 패널이 말씀하셨듯 “공공기금으로 운용되는 한 지원사업의 수혜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사업적 측정은 필요하다”는 말에 원칙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나는 자꾸 지금의 우리 동아리가 생각난다. 맞다. 우리는 돈 안되는 봉사 동아리고, 우리의 계획이라 해 봐야 우리가 능동적으로 , 즐겁게 꾸준히 봉사하고 싶을 뿐이다.

아니면, 그저 우리가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르는 걸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아무리 똑 부러지게 온갖 활동을 하건 말건, 우린 고작해야 확실한 연간계획도 없이 뒤풀이 밥값이나 쓰고 다니는 봉사·종교분과 동아리일 뿐이니까 말이다.

창업동아리나 할껄

철 없는 소원을 정말 개인적으로 빌어보자면

전국적으로, 특히 버스 타고 한참 가야 하는 서울에는 청년의 구직 활동이나 문화 사업, 진로 탐색 등을 지원하는 사업이 많다고들 한다. 신문에서 밖에 보지 못했지만, 한때 서울시의 ‘청년수당’도 꽤 화제가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그런 지원 사업들에 대해서는 많이 알지 못한다.나야 뭐 학교만 다니던 사람이고, 세상 돌아가는 물정을 잘 몰라서 그렇다. 미안하다.

하지만 그 지원 사업을 신청하려는 청년들의 입장이, 우리 학교 동아리 지원 사업을 신청하려는 내 입장과 비슷하겠다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다. 그들도 아마 그들이 뭘 하게 될지에 대해 개략적인 틀밖에 없는 상황일 것이고, 그래서 “이번에도 해내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같은 호언장담밖에 하지 못하기에, 초조하고 우울하고 그러지 않을까 싶다.

일정 수준 이하까지는 그냥 믿고 지원해 주고 과정을 지켜주는 기회도, 조금은 있었으면 한다. 우리 동아리에게도, 혹은 그 청년 지원 사업에 신청한 사람들에게도 말이다. 우린 모두 ‘이렇게 될 수도 있고 저렇게 될 수도 있는’ 그런 상황 앞에서 불안해하는 사람들이고, 그 불안감을 지원 사업으로, 아주 약간은 지울 수 있다면 큰 힘이 될거라고 믿는다.

그렇다고 우리가 도둑놈 심보처럼 억억 거리는 거금은 꿈꾸지도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애초에 우리가 입력하는 “지출 증빙 액수” 에 가장 많이 찍히는 항목은 [뼈해장국, 5500원]이었다. 몇 학기 넘게 총무로 일해온 내가 자신있게 증빙할 수 있다. 믿어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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