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이유가 필요하지 않았다. 로코의 여왕 서현진이 멜로드라마를 찍다니. 서현진이라는 석 자만 보더라도 <사랑의 온도>를 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훈훈한 남주 양세종(온정선 역)과 냉미남 김재욱(김정우 역)까지. 추운 겨울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줄 따듯한 멜로드라마가 그려졌다.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보면 볼수록 마음이 설레는 게 아니라 차게 식어만 갔다.
<사랑의 온도>는 방영 내내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장면에서 ‘사랑’을 외치고 있었다. <사랑의 온도>가 말하는 사랑이 진짜 사랑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마지막 회를 앞둔 지금, 차근차근 짚어보고 싶어졌다.
#1. 미안하지만, 여성은 이럴 때 반하지 않는다.
"눈 아래로 훑는 거 얼마나 기분 나쁜 줄 알아?"
"기분 나빠도 참아. 대부분 사람들 기분 나쁜 거 참으면서 살아"
지홍아(조보아 역)는 길을 가다가 낯선 남성과 부딪힌다. 둘은 곧 시비가 붙는다. 그러던 중 남성은 노골적인 시선으로 지홍아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는다. 이에 지홍아는 "내가 댁 보라고 예쁜 줄 알아? 이거 성희롱이야"라고 소리치며 바로 부당함을 얘기한다.
그러나 오히려 제3자인 온정선(양세종 역)이 남성에게 사과하며 사건을 일단락 시킨다. 충격적인 점은 지홍아가 시선폭력을 참으라고 한 온정선의 모습에 ‘심쿵’해 반한다는 것이다. 마치 ‘날 이렇게 대한 남자는 네가 처음이야’라는 식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성은 이런 남성에게 끌리지 않는다. 명백한 시선폭력이 발생한 상황에서, 심지어 자신이 시선폭력을 당했다는 사실을 얘기하고, 상대방 또한 인정하는 상황에서 그저 참으라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끌리지 않는다. 온정선과 같은 태도는 여성이 성폭력에 처했을 때 부당함을 말하지 못하게 억압할 뿐이다.
게다가 ‘왜 너만 예민하게 굴어?’와 같은 반응은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가하는 것과 같다. 여성이 ‘나쁜 남자’를 좋아한다는 시대착오적 발상도 엿보인다. 설사, ‘나쁜 남자’를 좋아하는 여성이 있더라도, 이 장면만큼은 온정선은 나쁜 남자도 아닌 ‘나쁜 새끼’다. 미안하지만, 여성은 ‘나쁜 새끼’한테 끌리지 않는다.
#2. ,사랑에서 ‘여자짓’ ‘남자짓’이 필요해?
“어. 이거 여자짓이야. 어우 내가 이 상황에서 여자짓을 한다. 위로받고 싶어서.”
이현수(서현진 역)는 드라마 작가로, 자신이 쓴 드라마의 시청률이 부진해지자 우울함에 빠져있다. 그때 사랑하는 사람인 온정선이 자신의 집으로 찾아오자 눈물을 쏟으며 이처럼 말한다. “어우 내가 이 상황에서 여자짓을 한다. 위로 받고 싶어서.”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고 연약해진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여자짓’으로 명명한다.
마치 ‘연약하고 잘 우는 것’이 여성의 특징인 마냥 왜곡된 여성성을 만든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민을 얘기하고 위로받고 싶어 하는 행동은 여성만 하는 ‘여자짓’이 결코 아니다. 사랑하는 관계에서 누구든지 할 수 있는 행동이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단어도 아닌 ‘여자짓’을 굳이 만들어 사용할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이 든다.
“죄송해요 미안해요 감사합니다. 다음부터 나한테 그런 말 하지마.
그런 말 빼고 내가 너한테 해준 배려에 대한 다른 말 듣고 싶어”
?“대표님 지금 남자짓 하시는 거예요?”
한차례 ‘여자짓’ 표현으로 홍역을 앓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남자짓’이라는 대사가 등장했다. 마치 ‘여자, 남자의 고정된 특징이 따로 있다는 게 아니라, 연인 사이에서 사랑받고 싶어 하는 모습을 표현하려 했던 거야!’라고 항변하고픈 의도가 보인다.
그러나 좋아하는 사람에게 호감을 사고 싶어 하는 모습을 ‘여자짓’, ‘남자짓’으로 표현했다 해도 문제다. 사랑의 관계에선 남녀 사이만 존재하는 것이 아닐 터. 여자-여자 커플일 경우 상대방에게 호감을 표시해야할 땐 둘 다 ‘여자짓’을 하는 것인가? 이런 모호함에도, 굳이 대시하는 행위를 ‘-짓’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싶다면 차라리 ‘연인짓’, ‘애인짓’을 추천한다.
#3. 괴롭힘=좋아함은 성립 불가의 공식
“둘이 언제부터 사귀기 시작했어?
사귀는 게 아니면 썸 타는건가?”
“아니거든!?”
드라마 PD인 김준하(지일주 역)는 작가 작업실을 내 집 마냥 들락날락한다. 그런데 매번 방문할 때마다 보조작가인 황보경(이초희 역)에게 밥을 차려주기를 바란다. 항상 짓궂은 말로 황보경을 놀리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황보경은 툴툴대면서도, 짜증을 내면서도 결국 밥을 해준다.
어느 날 지홍아가 “언제부터 사귀기 시작했냐”며 이 둘을 연인으로 의심한다. 그러자 김준하는 깜짝 놀라 부끄러워하며 작업실을 떠난다. 그동안 김준하가 황보경에게 밥을 차려달라고 하고, 놀렸던 행위가 좋아하는 마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그러나 괴롭힘은 좋아한다는 표현이 될 수 없다. 데이트 폭력과 관련된 뉴스에서, 폭력을 저지른 남성이 폭력의 이유로 다음과 같이 말하는 장면을 수없이 봐왔다. “사랑해서 그랬다.” 폭력과 괴롭힘에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본질은 같다. 실제로 데이트 폭력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현 사회에서, 김준하가 보여주는 사랑의 방식은 데이트 폭력의 논리에 힘을 실어준다.
더욱이나 사랑을 그리는 멜로드라마에서 ‘괴롭힘=좋아함’의 공식을 당연하게 여기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괴롭힘은 폭력이다. 좋아해서 그랬다는 변명은 정당화될 수 없다.
#4. 잘 들어, 권력으로는 사랑을 가질 수 없어
"(술에 취한 채로)내가 사귀지도 않는데 프러포즈 해서 이상했니?”
"어렸을 때는 신뢰해야 사랑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신뢰와 사랑은 달라요.
대표님이 좋은 여자 만났으면 좋겠어요. 좋은 남자니까. 차가운 사무실에서 자지 마세요."
늦은 밤, 엔터테인먼트 사장인 박정우(김재욱 역)는 소속 작가인 이현수를 불러낸다. 이현수는 막 샤워를 끝낸 직후였지만, 박정우의 전화에 풀메이크업을 다시 하고 그의 사무실로 간다. 둘만 있는 사무실, 박정우는 이미 취한 상태로 이현수에게 "내가 사귀지도 않는데 프러포즈해서 이상했냐."며 대시를 한다.
이에 이현수가 단호하게 관계의 선을 긋자, 그만 가보라고 한다. 그들의 만남은 5분 남짓. 늦은 밤 소속 작가를 술 취한 채로 자신의 개인 사무실로 불러낼 수 있었던 바탕엔 박정우가 사장이라는 사실이 존재한다. 그 외에도 일을 핑계 삼아 이현수와의 지속적인 만남을 시도한다.
시청자들은 이런 박정우 캐릭터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했다.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냐.’의 태도로 끝없이 대시 하는 박정우를 이해할 시청자가 21세기 몇이나 있을까. 심지어, 이현수는 애인이 있다! 그럼에도 박정우는 사장이라는 권력을 이용해 이현수와의 공적인 업무를 내세워, 사적인 만남을 이끌어낸다.
이현수의 마음을 차지하지 못하는 박정우가 드라마 내에서 굉장히 고독하고 쓸쓸하게 그려지지만, 그래선 안 된다. 상대방이 마음에 없다고 명확하게 의사 표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이용해 만남을 지속하려는 모습은 사랑이라 칭해질 수 없다. 박정우가 불쌍하지 않다. 그저 명백한 권력 행사다.
미지근한 사랑의 온도를 달래는 '마녀의 법정'
같은 시간대 방영하는 KBS <마녀의 법정>이 <사랑의 온도>의 시청률을 역전한 사실을 보면, 시청자들의 인식 변화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 <마녀의 법정>은 성범죄 특별 전담부의 검사와 사건들의 이야기다.
남성=이성적·권력 지향적, 여성=감정적·인간 중심적이라는 고정된 성역할을 아예 바꿔서 캐릭터를 설정하거나, 남자 검사의 성을 ‘여’ 씨로 해서 ‘여검사’로 칭하게 하는 등 뛰어난 젠더 감수성을 보인다. 몰카 범죄, 아동 성범죄 등 최근 빈번하게 발생하는 성범죄를 다루며 근본적 원인이 무엇인지 얘기한다. 이런 <마녀의 법정>의 스토리텔링은 현실적으로 그려져 많은 시청자의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사랑의 온도>는 지속적인 시청률 하락세를 타며 마무리를 앞두고 있다. 지지부진한 스토리 전개와 이해할 수 없는 캐릭터들의 변화가 시청자들을 혼란스럽게 했다. <사랑의 온도>가 말하는 사랑에 시청자들이 더 이상 공감하지 않는다는 이유도 분명 있다.
정체된 젠더 감수성과 고정된 성역할을 재생산 하는 멜로드라마는 시청자의 가슴을 설레게 하지 못한다. 이미 많은 이들이 과거 사랑이라 칭해졌던 잘못된 태도와 폭력을 사랑과 구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진짜 사랑이 무엇인지 근본적인 탐색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시청자들의 ‘사랑의 온도’가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주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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