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전시하는 사회에 대하여

많은 약자들은 고통을 전시한 대가로 관심을 받을 수 있었다.

바다 건너 아이스버킷과 우리 동네 철수

세계로 퍼진 아이스버킷 챌린지는 여러 모로 흥미로운 현상이다. 기부와 복지에 관련된 여러 이슈들은 이 유희와 ‘힙’이 절묘하게 결합된 이벤트를 통해 사람들에게 많은 생각할 거리를 주고 있다. 예를 들면 기부가 올바른가, 아니면 기부 대신 복지가 올바른가, 진부하지만 결론이 나지 않는 질문부터 시작해 아이스버킷 챌린지의 종착역이 어디인가 하는 질문까지. 그리고 나는 한 가지, 조금 다른 것을 떠올린다.

잠깐 시간을 돌려 몇년 전의 초중고교 무상급식 논쟁이 있었던 시기로 가보자. 이때의 논쟁에 대해 흥미가 있었던 사람이라면 이 정책을 둘러싼 논란에서 중요했던 소재들을 아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개중 하나가 이른바 눈칫밥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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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급식을 지지하던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기대했다. 급식비를 개별 학교에서 걷지 않고 세금으로 대체하여, 무상급식을 통해 '철수'라는 가난한 아이가 별도의 서류를 제출하거나 행동을 하지 않아도 다른 학생들과 똑같은 밥을 먹을 수 있게 되기를. 반대로 무상급식을 반대하던 사람들은 충분히 학생의 프라이버시를 보장하면서도 선별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문제를 세금을 통해 해결하려 든다고 반박하며 맞섰다.

이 대립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누구도 철수의 가난함과 배고픔이 다른 사람에게 공개되어도 괜찮다고 주장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순하다. 철수의 빈곤함이 ‘전시되어서는 안된다’ 는 우리 사회의 합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무상급식에 관한 논쟁은 눈칫밥을 없애느냐, 눈칫밥의 눈치를 없애느냐의 차원에서 이루어졌지 누구도 눈칫밥이 당연하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갑자기 이 이야기를 왜 꺼냈냐고? 내가 던지고 싶은 화두는 이것이다. 누군가의 빈곤, 곤란함, 아픔은 사회에서 어떻게 소모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전시'되어도 마땅한가?

이런 관심이라도 감사합니다

앤서니 캘버자르는 본인이 진행한 아이스버킷 챌린지를 통해 자신이 5개월 전 ALS 판정을 받았음을 밝혔다. 이전 기사를 인용하면, 그는 ALS를 감당할 치료비가 없으며, 그래서 얼음물을 끼얹기 싫으면 KISS MY ALS하라고, 기부를 하라고 ‘도발한다’. 사실 그것은 도발이 아니다. 지은 죄가 있는 것도 아닌, 가혹한 상황에 처한 사람의 절박한 기발함이었을 뿐이다.

웃어도 웃는게 아니다

웃어도 웃는게 아니다

아이스버킷 챌린지의 흥행을 바라보는 ALS 환자들과 그 가족들은 이 이벤트에 어떠한 불쾌감을 표출하기는 커녕, 오히려 “관심을 처음으로 받아 본다” “제발 아이스버킷 챌린지를 끝내지 말아달라”며 절대적인 지지를 넘어 종교적인 의지까지 보이고 있다. 즉. 그들에게 있어 자신들의 아픔이 전시되는 일은 급한 문제가 아니다. 이쯤에서 철수와 앤서니를 서서히 같은 눈높이에 겹쳐서 보도록 하자. 여러분 중 대부분이 철수의 상황을 가급적 드러내선 안 된다는 사실에 동의한다면, 앤서니의 ‘도발’은 어떻게 취급되어야 하는 것일까?

앤서니는 빌 게이츠가 아이스버킷 챌린지를 통해 서피스 3을 광고하는 것도 보았을 것이고, 온갖 사람들이 ‘힙’해지고 싶어 그 행동에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자신의 고통과 암울한 미래에 그다지 공감하지 않을 것도 알 것이다. 아울러 자신의 고통이 이렇게 유희적으로, 매우 ‘힙스터’적으로 전시되고 활용된다는 사실에 아무런 불쾌감을 표출하지 않는다. 철수로 치면,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엎드린 것을 교실 학생들 모두가 따라하며 놀아도 철수가 마음의 상처를 입기는 커녕, 오히려 제발 널리 퍼져서 나를 포함한 결식아동을 도와 달라고 학교를 돌아다니며 구걸을 하는 그림이다.

더 많은 사람이 더 당연하게 품위를 누릴 수 있도록

어렸을 적, ‘기아의 고통’을 체험하자는 명목으로 사람을 모아 음료만으로 24시간을 버티며 배를 굶는 아이들의 사연을 함께 방송했던 프로그램을 기억하는가. 미디어는 기아아동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그들의 일상을 전국의 시청자들에게 훌륭히 전시했다. 아이들은 가난을 TV에 전시한 댓가로 성금을 받을 수 있었다. 사람들의 좋은 취지는 수많은 '철수'와 '앤서니'의 무너진 자존심까지는 닿지 못했다. ‘알아야만’ 관심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아니면, 응당 그 아이들의 자존심을 ‘뻗대는’ 정도로 취급했거나.

ALS도, 무상급식도, 그 무엇도 근본적으로는 하나의 소재에 불과하다. 앤서니는 여러분에 비해 그저 재수가 없었기에 ALS에 걸렸고, 체면과 자존심을 버리고 ‘KISS MY ALS’를 요청했다. 이 사실은 언제든지 앤서니가 ‘우리’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굳이 ALS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그저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남의 도움이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지면 된다. 여러분도 운이 나쁘다면 그렇게 될 것이다. 세상에는 많은 위험이 상존하니까. 그리고 도움을 요청하게 된 당신에게는 빌 게이츠 대신 이재용 사장이, 서피스 대신 아티브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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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너다! ⓒTMS

남의 곤궁함과 괴로움을 ‘전시되는’ 것이 허용되고 그것이 ‘힙’하게 소모되는 사회에서 전시의 조명은 언제든지 당신을 비출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전시는 부유하거나 유명한 이들의 유희로 소비될 수도 있다. 그런 관심이라도 괜찮다고, 그때도 말할 수 있겠는가. 타인의 품위를 돌려주는 것은 곧 내 품위를 보호받는 것의 시작이며, 남의 인간된 품위를 지켜주지 못하는 사회가 갖는 의미는 아이스버킷 챌린지로 끼얹는 얼음물보다 훨씬 더 차갑고 혹독하다.

단순히 ALS 환자를 돕는 것이 아이스버킷 챌린지의 모든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 처한 상황이 그들에게 자존심과 품위를 스스로 부수도록 강요하는 것을 막는 것, 그리고 그 목표를 위해 끊임없이 상상하고 고민하는 것. 그것이 이 기발하다고 평가받는 이벤트가 나와 당신께 진정으로 던지는 숙제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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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우

김진우

Twenties Timeline (전) 피처 에디터. 모든 것을 고민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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