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은 모를 '빠른'만의 고충들
#1 모두 처음 모인 자리에서
자, 우리 다 같이 자기소개 하고 시작할까요? 이름이랑 나이랑, 뭐 적당히 하고 싶은 말 정도 합시다!
네, 저는 허빠른이라고 하고요. 여기서 얼마나 있었고… 나이는, 어, 저 일단 현역 12학번인데, 엄마가 94년 1월에 낳아주는 바람에 나이가 좀 헷갈려요! 초등학교 7살에 들어가서 93년생들이랑 친구하는 ‘빠른 94’입니다!
아놔 빠르긴 뭐가 빨라 자꾸! 93이면 93이고 94면 94지! (와하하)
거 나중에 족보 꼬지 말고 알아서 호칭 정리하세요! 다음! (와하하)
#2 오늘 저녁 배치받은 자대 생활관에서
이병 허빠른! 부르셨습니까!
(만면에 미소) 쫘식 바짝 쫄아가지고 ㅋㅋㅋ 너 몇 살이냐?
이병 허빠른! 구, 94년 2월생이라서 ‘빠른 94’입니다!
(정색) 야 니가 그렇게 빠르냐?
예?
(위장군기) 예? 이새끼 쳐돌아가지고 생일 존나 빠르다고 답도 존나 짧고 빠르네? 야 ㅅㅂ 너 저기 연병장 옆에 헬스장 뛰어가서 바벨 10kg짜리 들고와 10초준다! 뭐해 씨발!! 빠르게 안뛰고!!!
...그렇다. 여러분?가운데?적어도 6분의 5 정도, 그러니까 1월이나 2월에 '태어나지 않은' 분들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을 일들이다.
하지만 나는 충분히 이해한다. 나 역시?‘빠른 94’로 태어나, ‘7살에 입학’한 이후 계속하여 경계선 위를 부유해 왔기 때문이다.?이른바 “빠른년생”. n년생도 아닌, 그렇다고 n-1년생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한 이상한 상태. 예컨대 93년생과 같은 나이를 말하면 “니 나이 그거 아니지 않아?”라는 말을 듣고, 94년생과 같은 나이를 말하면 나이 깎아 말한다는 대꾸를 받아야 했다. 그렇다고 귀찮은 김에 ‘나 빠른 94야’라고 말해 보아야 면박이 날아온다.
"아니 뭐가 그렇게 빠르다고 빠른년생 사람들은 자기 나이에 유별이야?”
이럴 때마다 빠른년생들은 이런 대꾸와 면박에 그냥 웃으며 조용히 있다가 알아서 사이를 정리해 왔지만, 사실 속으로 하고 싶은 말들을 삭이고 있었을 뿐 그 침묵은 결코 유쾌했던 적이 없었다. 이제는 그 고통의 정적을 깰 때가 됐다. 전국의 몇십만 빠른년생들을 대표해, 이 서러운 나이에 대해 한 말씀 올리겠다. 이제 그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가시방석 같은 시간, 새해 봄학기가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 제가 서두른 것이 아닙니다...
우선 정의부터. 빠른 n년생이 뭔지는 모두가 안다. 정확히는 n년생인데 n-1년생인 사람들과 함께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별 문제없이 지내 온 사람이다. 그렇다면?이놈의 빠른년생의 기원은 대체 무엇일까. 여러 학설이 있다.
‘입학을 3월에 하기 때문에 3월생부터 다음해 2월생까지가 신입생 기준으로 정해졌다’ 같은 그럴듯한 이야기부터 ‘음력과 양력을 둘 다 쓰는 우리나라 특성상 불가피하다’,?‘일제 강점기에 소년병을 한 명이라도 더 징집하기 위해 빠른년생이라는 것을 만들었다’까지. 하지만 무엇이 빠른년생을 만들었는지에 대한 근원은 분명치 않다.
하지만 분명한것은, 빠른년생 본인들이 ‘나는 학교를 빠르게 가고 싶다! 내 맘대로 입학하겠다!’ 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초등학교에서 입학하라고 통보가 왔고, 그래서 갔다. 서두른 일 전혀 없이 오라 할 때 들어가 열심히 친구 만들며 12년을 보내고 사회에 보냈는데! 이상하게 책임과 손해는 빠른년생들이 지게 되었다.
족보 브레이커니, 은근슬쩍 선배 (친구) 먹지 마라 같은 농담을 시작으로, 같은 학번 친구들의 끊임없는 ‘그럼 너 나보다 동생이네? ㅋㅋㅋㅋ’ 같은 놀림을 지나, 혼자 술집에 못들어가 모두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까지도 다 빠른년생들 탓이 되었다. 그러다 상철선배 같은 사람에게 “야 너는 왜 족보 꼬이게 이상한 때에 태어났어?”란 말을 듣고 집에 오면, 엄마에게 묻고 싶어진다. 몇 년도 아니고, 날 좀 몇 주만 더 빨리 낳지 그랬느냐고.
참고로 우리 엄마?입장을 밝히자면, 지금 내 생일에서 몇 주 더 빨리 해산이 되었더라면?난 미숙아였을 거라고 한다… 엄마 내가 괜한 거 물어봐서 미안해…
뭐가 그렇게 빠르냐면, 살아온 삶이 빠릅니다
내가 94년생이긴 한데 생일이 빠르다고 했더니, 혹자는 이렇게 되물었다.
‘넌 재수도 안 하고 현역 12학번이잖아.
그럼 걔네랑 나이 맞춰서 2016년 24살 하면 되지, 왜 꼭 25살인 것처럼 하려고 해?
물어나 보자. 내가 지금껏 살아온 삶이 있는데,
왜 내가 굳이 1년 덜 산 사람이 되고 싶어할 거라고 생각하는가?
나의 경험은 93년생의 그것과 꼭 같다. 밀레니엄과 함께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중학교 땐 아직 여전하던 외고 광풍 속에서 수학 시험 없이 고교 입시를 쳤다. 고등학교에 들어가 수능을 준비할 때엔 탐구 과목이 세 개로 줄어들었고, 대입 때는 수리 나형에 미적분이 추가됐다.?정직하게 말하자면,?비록 내가 서기 1994년에 태어났고 내 주민번호도 94로 시작하지만, 내 삶은 93년생들의 궤적과 함께 굴러 왔다. 예를 들자면, “94년생들 딱 보면 기억나는 TV만화들” 같은 거에 별로 공감이 안 되는 식이다.
내가 굳이 ‘빠른 n년생’이기를 자처하는 이유이기도 하다.?우리의 나이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빠른 n년생’ 보다 적당한 표현은 없기 때문이다. 태어나기는 n년도 1월이나 2월에 태어났지만, 삶의 굴곡은 초등학교에 같이 입학한 n-1년생 친구들의 것과 같으니까. 단순히 ‘몇 년생이다’, ‘몇 살이다’로는 확실히 설명하기 어렵고, 그렇다고 “학교에 빨리 입학” 같은 말을 붙이기에는 군더더기가 너무 많고, 1~2월에 태어났지만 빨리 입학하지 않은 사람들과 구분해 이야기하기에도 조금 어려운 것이다.
그나저나, 무슨 족보를 그렇게 열심히들 그리시나요
그럼에도 중용의 도를 닦은 훈수꾼은 어김없이 등장한다.
“야, 그냥 너네 빠른년생들이 확실히 하나로 딱 정해. 빠른 나이대로 살 건지,
니네 태어난 년도대로 살 건지. 괜히 왔다갔다해서 족보 꼬아먹지 말고.”
정작 생일 빨라서 고생인 사람은 따로 있는데, 이런 논리가 해결책으로 제시되는 순간 좌중의 책임론은 압도적으로 빠른년생 당사자들에게 쏠린다. “맞네 맞네” “나중에 정리 한 번 쫙 해 봐봐” 등등.
유감이지만, 빠른년생 입장에서는 이게 썩 쾌적한 해결이 못 된다. 이런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작 “너네 빠른년생”들이 호칭이며 상하관계 따위를?임의로 통일하고 정리하면, 사람들이 그걸 순순히 받아들여주지 않는 것이다. 왜 나이 깎느냐는 사람들 중에서도, 왜 나이를 올리냐는 사람들 중에서도 말이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다가, 문득 나이주의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렇다. 다른 것들에 비해 유난히, 연령과 출생 시기가 더 중요하고 우선시되는 그런 경향 말이다.
어느 자리를 가든 첫 질문은 정해져 있다. "너 몇 살이야?” 그 다음 이어지는 대화 역시 거의 비슷하다. 나이와 서열, ?호칭을 정리하고, 그제서야 뭔가 좀 대화가 편해지는 것이다. 꼭 서로의 나이를 가지고 위아래를 규정해야만 뭐가 편해지는 걸까? 평범한 생일자들 중에서도 나이주의를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하물며 언제나 ‘족보 브레이커’로서 경계를 떠도는 나 같은 빠른년생들은 오죽하겠는가. 제가 몇 살이냐고요? 아 씨 뭐라고 말하지? 이 사람은 올리는 걸 좋아할까 내리는 걸 좋아할까? 에라 모르겠다, 저 사실 빠른이라서요.
하지만 내가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안빠른년생’ 연상들의 입장은 또 다른 모양이다. 빠른94인 내가 만난 몇몇 93년생들은, 내 서열을 자기 좋을 대로 정하거나, 내 나이를 가지고 괜히 뭐라 하거나 했다. 이상하게 뭔가를 공고히 하고 싶어하는 듯이 보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자기와 동갑도 연하도 아닌 그 미묘한 위치, 나이주의적 사고방식의 예외 케이스를 참을 수 없어서일까.
그래요, 족보 브레이커는 이만 사라집니다.
나는 그냥 ‘빠른 94’라고 스스로를 설명하는 게 제일 편한데, 그들은 자꾸만 내 삶을 어떻게든, 주로 자기 연하로 재단하고 싶어했다. 93년생이든 94년생이든 하나만 하라며, 뭐가 그리 빠르냐며.
그렇지 않아도 2009년부터는 빠른년생 없이, 1월생부터 12월생까지를 한 번에 초등학교에 입학하게끔 했다고 한다. 그 전에도 이미 빨리 입학할 수 있는 아이들을 늦게 보내서 학교에 잘 적응하게 하는 게 학부모들 사이에서 유행이었다고 하더라. 그에 따라 이제는 ‘족보 브레이커’ 같은 말도 사라지겠지. 그래도 08년도까지 축적된 우리 ‘빠른년생’들의 삶은 이어질 것이다.
참, 이 기사를 쓰던 중, 내게 뭐가 그리 빠르냐고 자기소개 자리에서 면박(?)을 주었던 사람이 이런 말을 해 줬다.
"내가 너더러 뭐가 그리 빠르냐고 한 건, 네가 ‘빠른’이고 ‘느린’이고는 중요하지 않고 네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뭔지가 더 중요하다는 뜻에서 말했던 거야. 네가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이고, 어떤 일들을 해 왔는지를 더 얘기해 달라는 그런 거였지. 오해가 있었던 거 같다. 미안하다."
그러게, 내가 어딜 가든, 내 나이가 몇 살이고 내가 이 바닥에서 몇 년을 굴렀고 하는 것보다는, 그래서 지금 뭘 보여줄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
‘빠른년생’이 제도적으로 사라지게 될 2009년 이후로도, 사실은 그 이전에도 진행되었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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