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주목받을 할로윈이 있었다면
다들 그랬겠지만 내게도 학교 축제란 멍청하고 지루하고 무의미했다. 그건 축제라기보다는 ‘학생이라면 응당 이렇게 놀아야지! 허허’ 하는 어르신들의 생각에 맞춰 하루 놀아드리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그러다가 딱 한 번, 중학교 3학년 때 학교 축제가 재미있었던 적이 있었다. 새 교장선생님이 부임하시더니 축제도 바뀌어서, 덥고 따분한 체육대회?대신?태어나 처음으로 ‘가장행렬’이란 것을 하게 된 것이다.
당시 학교에선 그 누구도 대관절 가장행렬이 뭣하는 것인지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일단은 새로운 시도라는 점에서 다들 관심을 기웃거렸고, 드디어 각 반마다 직접 테마를 정해서 의상을 맞춰 입고 행진하면 되는 것임을 알아내고 말았다. 쉽게 말해 ‘튀는 꼴’을 하라는 것이었는데, 당혹스럽고도 멋진 과제였다. 왜냐면 우리는 삶의 대부분의 경우에 남들과 비슷해보일 것을 강요받았기 때문이다.
머리부터 화장까지 교칙이나 옆 사람과 비슷하게 입고 꾸미는 것만 알던 우리에게, 본질적으로 다른 방향의 의상과 화장을 갖춰 오라는 것은 정말 어려운 과제였다. 하던 지랄도 멍석을 깔아주면 못 한다던가? 그때부터 가장행렬 당일까지 우리의 여정은 험난했다. 학급회의가 열렸고, 무엇이 식상하고 무엇이 그럴듯하며 무엇이 주목받을 만하고 무엇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지에 대한 열?나는?토의가 이어졌다.
결국 테마가 정신병원으로 잡혔다. (당시 우리의 정치사회적 상상력이 딱 교실 창문 크기만했다는 것을 이해해 달라.) 축제 당일에 우리는 모두 환자복으로 갈아입었고, 남학생 몇몇을 따로 뽑아 여자 간호사 복장을 입혔다. 그런데 하고 보니 분장 퀄리티가 생각보다 꽤 괜찮았다. 다른 반에서 찾아와 낄낄대며 웃을 정도였으니까. 물론 다른 반 친구들도 각자의 재미있는 컨셉(유치원복이라거나 등등)을 들고 나왔었다.
그렇게 다른 반 친구들이 모여 서로의 모습을 주목해 주고, 칭찬하고, 깔깔대고 웃으면서 그때 생각했다. 어쩌면 이런 게 바로 영화에서나 보던 ‘할로윈 데이’의 재미가 아닐까 하는 것을. 모두가 각자 자신의 방법으로 이 순간의 주인공이 되는 그런 재미 말이다.
고3의 똘끼라는 것이 폭발한다!
대한민국의 청소년의 가장 비극 중 하나는, 모두가 주인공이 되고 싶어하지만 그 중 상당수가 그럴 기회조차 갖지 못한다는 점에 있겠다. 우리가 제도권 내부에서 인정받을 방법이라고는 사실상 공부밖에 없는 것이니까. 우리의 자아 정체성이나 개별성, 독자성, 창의성 같은 것들은 안타깝게도 시험 점수로 환산될 수 없는 것들이며, 그러하기에 대체로는 없는 것으로 취급당한다.
그러나 무슨 취급을 당한다 한들, 이들의 가려지지 않는 개성이, 인정을 갈구하는 마음이, 주목받고자 하는 욕망이, 숨겨지지 않는 개그 욕심이 사라지겠는가. 그 어느 때보다도 왕성하게 타인의 인정을 요구하는 이들의 마음은 여기서부터 ‘모범’과 ‘비행’ 사이의 어딘가를 맴돌기 시작한다. 아니면, 그게 모범인지 비행인지 알 수 없는 전혀 대안적인 형태의 인정을 바라고 찾아내든가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의정부고의 졸업사진 촬영은 대안적인 인정을 욕망하는 투쟁의 장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이제는 거의 하나의 경연대회나 다름없는 의정부고 졸업사진 촬영 과정은 자못 진지하다. 참여자들은 몇 개월 전부터 아이디어를 짜고, 서로 컨셉이 겹치지 않게 눈치 싸움을 한다고 하며, 심지어 학생들과 학교의 트러블이 있은 이후로는?아예 학교가 나서서 계획서를 체크하기도 한다. 이리하여?학생들 마음 속에 잠자고 있던 ‘창의력/장잉력’은, 졸업사진 촬영이라는 공적인 순간에, 별다른 마찰음 없이 분출된다.
게다가 이 ‘전통’은 이제 의정부고에 국한되지 않게 되고 있다. 여러 다른 고등학교에서도 “우리도 저렇게 한번 해보자”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몇몇 다른 고등학교에서도 상당히 높은 퀄리티의 코스프레들이 등장하고 있다.?처음 몇몇이 자신의 숨길 수 없는 똘끼를 졸업사진으로 발현시켰던 것이, 이제는 이렇게 하나의 축제가 되어 버린 것이다. 모두가 저마다의 창의력과 개성을 빛내는, 한 번쯤 사진을 찍는 그 순간만큼은 주인공이 될 수 있는, 말하자면 ‘한국식 할로윈’이라 부를 만한 어떤 것으로 말이다.
‘발퀄’도 괜찮아, 이건 너의 축제니까
게다가 이렇게 코스프레에 참여하기 위해서 무슨 특별한 기술이나 ‘퀄리티’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창의력과 발상인데, 바로 이 점이 축제가 된 졸업사진 코스프레 놀이를 더욱 빛내고 있다. 물론 해를 거듭할수록 코스프레의 퀄리티가 올라간 것도 사실이지만, 단순한 ‘쓸고퀄’ 작품들만큼이나 빛났던 것들은 아이디어가 더 돋보이는 것들이었다.
금발 가발 하나에 아버지 정장 비스무리한 것을 빌려 입은 것만으로도 미국 대통령 후보인 ‘도날드 트럼프’ 코스프레를 할 수 있고, 훈도시 하나 입고 얼굴에 물감칠을 하면 ‘곡성’이 된다. 혼자 어려우면 둘이 할 수도 있다. 아니면 애초에 타고난 싱크로율이나 외모를 활용할 수도 있다. 오히려,?발퀄이라서 주목받는 수도 있다. 예컨대 ‘둘리의 얼음별 대모험’에 나오는 ‘가시고기’를 코스프레한 사람이 바로 그랬다. 직접 보시라.
어지간히 약을 빨지 않고서는 이걸 할 엄두조차 못냈을 것이지만, 이들은 그것을 해내었다. 그리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수준의 퀄리티를 들고 코스프레라고 우기는 모습조차 웃음을 자아낸다. 누가 봐도 감탄할 정도의 고퀄도, 누가 봐도 뿜을 저퀄도, 모두 이 축제에 동등하게 참여해 사진을 찍을 수 있다. 누구든, 이 축제에 참여하겠다는 마음만 있다면, 적어도 한 순간쯤은 모두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축제인 것이다.
이제 의정부고 졸업사진 촬영은 단순한 교내 행사를 넘어 트렌드의 한 축으로 볼 수도 있을 정도로 커졌다. 대학교 새내기들이 만우절에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것처럼 말이다. 다만 교복 꺼내 입는 정도보다 훨씬 재미있고, 창의적이고, 평등한 기회를 제공받기에 더욱 과감하다는 점이 월등히 다를 뿐. 그리고 앞으로도 한동안 이 트렌드는 더더욱 활발해질 것이다. 어쩌면 언젠가는 정말로 ‘할로윈’에 맞먹는 코스튬 축제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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