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폭력 in 단톡방] ① 더 못 있겠으면 걍 나와라

나처럼 꼬박 1년 끙끙 앓지 말고.

집처럼 지내던 동아리방에 더 이상 갈 수 없게 되었다. 오지 말라고 막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내가 이제는 예전과 같은 마음으로 웃으면서 지낼 수가 없어져서다. 지난 방학, 나는 동기 남자애들의 단톡방을 나갔다. 여자의 벗은 모습을 사진으로 공유하고 지난밤에 만난 여자와의 썰을 풀던 곳. 그 현장에서 나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지금까지 벌어진 일들에 내 책임을 회피할 수 없었다.

동아리방

(위 사진은 이 글의 내용과 무관한 동아리방 사진입니다.)

고등학교 친구와 졸업하면서 했던 약속 때문이었다. “아닌 것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말하자.” 그걸 지키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러려면 2년 동안 이어지던 친목을 깨야 했고, 많은 결심이 필요했다. 결말 이야기는 마지막을 위해서 잠시 미루고, 우선은 처음 그 단톡방에 내가 ‘초대’되었던 새내기 때로 돌아가 보려 한다. ‘아닌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나의 부끄러운 시간들을 향해서.

 

무의미한 대화 속 서열 정리에 쓰이던 여자 내력

엄밀히 말하면 그 톡방에 ‘모든 학과 남자’가 있지는 않았다. 제일 잘 노는 친구가 제딴에 ‘술자리에서 쓰러지지 않을’ 사람들을 선발했다. 아마도 나는 상대방이 어떤 이야기를 해도 가만히 듣기만 하는 서글서글한 성격 때문에 선발된 듯했다. 어딜 가나 모두에게 착한 사람, 그래서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기도 했으니까. 그렇게 무슨 어벤저스 결성하듯 뽑힌 남자들이 아침에 꺼내는 인사말은… “섹스하고 싶다”였다.

그들에게 여성은 점령의 대상이었고, 그래서 동기 여자애들은 대부분 덮어놓고 비하하는 대상이었다. MT 때 무거운 짐을 안 든 것이 누구이며 축제 때 누가 일을 하지 않았는지는 남녀에 관계가 없었지만, 그들은 여자를 욕했다. 자신에게 거의 넘어왔지만 결국 자기 것이 되지 않은 여자에 대해서는, 그 대화방에서 더욱 가혹했다. 여자들이나 과일 소주를 마신다면서 참이슬 클래식을 시키고, 서로 여자를 얻거나 놓친 역사를 교훈하면서 낄낄거리고 있었다.

장동민 팟캐스트 옹꾸라 발언

그리고 대부분은 자기가 팩트를 말한다고 생각한다… ⓒ채널A

어쩌다 그 역사를 더 배우려고 첫차가 뜰 때까지 자리를 지키곤 했다. 이런 식으로 다음 자리를 이동하다 보면, 단톡방에서 종종 보았던 그들의 맨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 남자들에게 서열을 나누는 기준은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소주 주량, 섹스 경험, 선배의 호출. 이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목소리가 높았다. 어쩌다 선배가 동석하면 선배도 우리도 ‘역시 믿을 건 남자뿐’이라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그곳엔 새터 때 영문 모르고 마셨던 의리주처럼 의미 없는 말들이 많았다. 이 판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떠나는 이에게, 그들은 이유와 상관없이 ‘트롤’이라며 온갖 욕을 다 먹였다.

차라리 못 한다는 욕을 먹을지언정 트롤이 되기는 싫었다. 그들이 적극적으로 일하는 동아리에서 나도 임원을 하고 싶었고, 애써 불편한 관계가 되기 싫었다. 그래서 정말 잠자코 있었다. 술자리는 막차 시간을 핑계로 피하면 그만이고, 단톡방에서는 일단 읽기만 하면 굳이 반응하지 않아도 별 문제가 없었다. 이 관계를 보증해 주는 어떤 거래가 필요하다 싶을 때쯤이면,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털어놓고 놀림 받는 소재가 되기를 택했다. ‘술 여자 선배’라는 그들의 서열 기준으로 보면, 나는 완전히 초보였으니까.

 

딱 1년 지나고 보니 더는 입 닫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달력이 넘어가고 선배가 되니, 그 기준에 ‘(특히 여자)후배 공략 능력’이 아무렇지도 않게 추가됐다. 내가 본 선배는 술을 잔뜩 먹이고 다음 날 아침에 컵라면을 사 주며 갖은 생색을 다 냈다. 그것보다는 좋은 선배가 되자고 생각한 건 나뿐이었던지, 대부분의 그 남자들은 자기들이 본 그 얼굴을 그대로 복사해서 후배들에게 보여줄 뿐이었다. 단톡방에서의 그들은 술자리를 즐기지 않는 후배들을 고까워했고, OT 갔다 온 누군가가 “괜찮은 여자”의 사진을 돌리며 놀았다. 이쯤 되면 내 친구들 각자의 인격 문제가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돌아가는 방에서는,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이렇게 메스꺼워진다.

장동민 팟캐스트 여성혐오 관련 의견 트윗

하지만 그걸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어떤 결과가 돌아올지가 두려웠고, 마지막으로 조금 더 버텼다. 단톡방 멤버들과 술을 마시던 방학 동안은 더 이상 꺼낼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자주 자리에 나오지 않았던 나에게 그들은 말했다. 네가 술에 취하는 동안 뒤에서 다 챙겨준 우리에게 감사하라고. 절망스러웠다. 나는 사람들과 친해지려는 단순한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사실 이 모임을 버티게 하는 건 몇 번의 술자리와 자신보다 약한 사람들에 대한 욕 바가지였다. 그걸 너무 늦게 깨닫고 집에 돌아가는 길은, 유난히도 어두웠다.

동아리 임원 선배가 된 나는 취한 후배들에게 술 대신 물을 채워 주고, 밥을 먹을 때마다 임원들을 평가해 달라고 요청하며 최대한 편하게 다가가려고 노력했다. 처음 내가 ‘어벤저스’ 단톡방에 초대됐던 것과 같은 이유로, 내가 부담 없는 성격이어서, 후배들과도 역시 어느 정도는 쉽게 어울렸다. 속사정을 좀더 말할 수 있는 선배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갔던 방학 때의 MT, 그것이 단톡방을 나가게 된 결정적 계기였다. 산책을 하는 동안 여자 후배들이 이야기한 경험들이, 온통 그 단톡방 동기들에 관한 것이었던 것이다.

수목원 산책

노래방에서 옆에 앉으려고 치근덕거렸던 누구, 집에 데려다 준다고 하더니 허름한 방으로 데려가더라는 다른 누구… 내가 입 다물고 무신경하게 지내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이 자식들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는 사실에 너무 화가 났다. 어떤 후배는 이걸 나에게 털어놓기까지 너무 무서웠다고 고개를 숙였다. 왜냐고 물었더니, 아무튼 나는 그 사람들과 친하지 않느냐고 한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건 딱 하나였다. 가해자들과 관계를 끊고, 이 단톡으로 인해 피해를 받았을 사람들과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다.

 

이 감수성과 의기가 더 무디어지기 전에

돌이켜 보면 조금 더 빨리 마음을 정하고 용기를 냈어야 했다. 다른 사람이 그들을 욕하고 있을 때도, 나는 ‘난 그나마 개중 괜찮은 축이니까’ 하고 자기옹호를 하고 있었다. 물론 이제는 그런 변명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안다. 남자들만 모인 자리는 그 자체로 충분히 다른 사람을 짓누르는 권력을 가진다. 이런 자리의 친목으로 인해 불편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건 최대한 빨리 무너져야 하는 게 맞다. 당장 내가 먼저 불편했다. 누구보다 가장 이런 자리를 태연하게 즐기고 있어야 할, 나 같은 ‘사람 좋은 사람’이 말이다.

단톡방 싸우고 나감

그렇다고 이렇게 싸우고 나가진 않았다…

꼭 필요한 내용만 전달하고 나가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길어졌다. 단톡방에 최후 변론을 적어 올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눌렀다. 채팅방 나가기. 그리고 그 다음 결말이 어떻게 되었는가 하면… 이보다 더 나쁜 전개가 있을 수 있을까 싶다. 1) 그 친구들은 내가 성적인 농담을 불편해할지를 전혀 몰랐(단)다. 2) 나를 다시 초대하더니, 다시는 이런 이야기를 꺼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3) 한데 그 후 그 단톡방에서는 더 이상 어떤 이야기도 꺼내지지 않았다. 방이 죽은 것이다.  4) 날 다시 초대한 이들로부터는 개인적인 연락이 끊겼다.

종합하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트롤이 되면 이런 일이 일어나는구나 싶다. 잘은 몰라도, 아마 나 한 명만 뺀 단체방이 하나 새로 만들어졌을 테지. 그래도 나는 친구와 했던 약속을 한 번 지켰다. 아닌 것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말하자던 정의감 넘치는 약속 말이다. 그 친구는 여전히 내가 고딩 때의 패기 그대로 당당하게 살고 있는 줄 안다. 그 친구에게 거짓말해서 미안했다는 말을 전하며 끝내고 싶다.

친구야, 좋은 어른이 되자. 정말로.

안읽은 카톡 300개

그리고 지금도 하루에만 몇백 개씩, 저 노란 네모틀 안에서 ‘아닌 것’들이 쏟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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