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뚜껑에 담긴 이야기들

백 마디 말을 대신해주는 스티커들

누군가는 노트북에 뭔가를 입히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손필기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어떤 수업 시간 중이었다. 노트북 시계를 확인하면 된다는 것도 잠시 까먹고 시계를 보려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더니 수많은 노트북들이 질서정연하게 교수님 말씀을 받아 적고 있었다. 아무 것도 붙이지 않은 깨끗한 것부터, 딱 한두 개 스티커만 얌전히 붙어 있는 노트북도 있었고, 아예 원래 무슨 기종이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다닥다닥 도배해 놓은 노트북도 있었다.

생각해 보니, 나는 아직까지 노트북 뚜껑에 아무 스티커도 붙이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인 것만 같은 상태로 노트북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어떤 변화를 줄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보지 못했다. 자연히 궁금해졌다. 그렇다면 자기 물건에 자기 스티커를 붙인 저들은 다들 어떤 생각으로, 뭘 표현하고 싶어서 노트북에 스티커를 붙이고 다니는 걸까. 그래서 들어 보았다, 서로 다른 스티커들을 붙이고 다니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CASE 1 : 김정원

김정원의 노트북.

김정원의 노트북.

Q. 자기소개를 간단히 부탁드려영! 이 스티커와 관련해서 오빠는 어떤 사람인가요?
A. 안녕하세요, 우선 저는 글을 쓰는 사람이구요. 힙합엘이(HiphopLE), 트웬티스 타임라인(20’s Timeline), 쇼프(Syoff), 음악취향y 같은 웹진에서 김정원 혹은 멜로(Melo)라는 이름으로 정규 에디터, 혹은 컨트리뷰터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주로 흑인 음악, 그러니까 힙합이나 알앤비 장르에 관해 글을 쓰는 편이고, 방송 미디어나 20대 생활 전반의 동향에 관해서도 간혹 쓰고 있습니다. 올해 6월에는 힙합 관련 책에도 한 권 공저로 함께 했었고요.

Q. 다른 사람들은 스티커를 대체로 안 겹치게 붙이는 편이던데, 겹쳐서 붙였네요? 혹시 겹치게 붙인 이유가 있는지?
A. 일단 처음에 스티커를 붙이기 시작한 건 정말 단순한 이유였어요. 제 노트북이 H컴퓨터 제품인데, H컴퓨터 로고가 겉면에 작게 써 있어서 그 부분을 가리는 용도로 스티커를 하나 정도 붙였었어요. 근데 언젠가 제 주변 다른 글 쓰는 친구나 형을 통해서 남는 스티커를 공수(?)해왔고, 얻은 스티커 중 제 마음에 드는 걸 골라서 덕지덕지 붙이기 시작했죠.

그 이후로는 서랍에 대충 넣어둔 스티커들도 꺼내서 붙였고, 합정에서 여자친구랑 어느 멀티샵에서 들어가 산 스티커도 사서 붙였죠. 이게 한번 붙이기 시작하니까 중독성이 있어서 마음에 드는 건 어떻게든 붙이고 싶어지더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어떻게 서로 겹치긴 해도 스티커 각각이 어느 정도는 그 의미를 드러낼 수 있도록 교묘하게 겹쳐서 붙이게 됐어요. 이제는 더 이상 자리가 없어서 붙일래야 붙일 수가 없네요.

Q. 이 스티커들은 어떤 것이고, 어디서 구한 건가여? 스티커가 정말 많은데… 다른 분들은 스티커가 그렇게 많지 않아서 하나하나 짚어가며 물어봤는데…
A. 앞서 말씀 드렸던 경로도 있구요. ‘아링낑낑’이라든가, ‘BXXCH BAD’, 파란색 배경에 투팍(2Pac)이 새겨져 있는 스티커는 힙합엘이에서 자체 이벤트성으로 만든 스티커에요. 또, 가장 큰 스티커인 ‘DAMN… YOU VISUALSLAVE’는 비슬라(Visla)에서, 맨 위 왼쪽에 붙어 있는 스티커는 호모 리리쿠스(Homo Lyricus)에서 만든 거고요. ‘You Can’t Fuck With Ma Team’, ‘The Way I Am’, ‘Do The Right’은 킥앤스냅(Kick&Snap)에서 사진 전시회를 할 때 제공했던 스티커에요. 아, 문화공간 1984에서 얻은 스티커도 있네요.

Q. 이 스티커들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나요? 스티커에 얽힌 사연이나, 스티커에 가지고 있는 의미들이 있나요?
A. 일단 많은 스티커가 힙합과 관련되어 있는 편인데요. 제가 생각하는 힙합의 가장 기본적인 정신은 자기 자신에게 떳떳해지는 것, ‘Real’함이라고 생각해서 그 정신, 가치관에 부합하는 걸 붙인 것 같아요. 동료들한테 받았던 스티커가 되게 많았는데, 그때 붙일 걸 고르면서도 가장 우선시한 게 그 스티커가 담은 의미에 대해 제가 잘 알고 있는가, 또 제 마음이 동하는가였어요. 이를테면 하이라이트 레코즈(Hi-Lite Records)라는 레이블의 행보나 기조를 전반적으로 좋게 보고요, ‘Bitch’라는 단어를 쓰지 말자는 의미에서 래퍼 루페 피아스코(Lupe Fiasco)가 만든 곡 “BITCH BAD”가 되게 신선한 움직임이었던 것 같고요.

그 외에도 본 용도와는 다른 의미를 부여해 붙인 스티커도 있어요. DEADEND 스티커는 사실 DJ 팀 데드엔드(DEADEND)의 스티커거든요. 지금 DJ 씬에서 엄청 잘 나가고 있는, mnet의 <헤드라이너>에 출연했던 킹맥(KINGMCK)의 소속 팀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전 팀 데드엔드를 잘 모르지만, 그냥 그 ‘데드엔드’라는 말이 막다른 길을 뜻하는 게 너무 좋았어서 그냥 붙여 놨어요. 모두가 알다시피 지금 한국 사회가 한 번 낙오되면 영영 못 돌아오는 시스템이나 마찬가지라서, 저 역시 이 길이 아니면 돌아갈 길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그리고 중앙에 떡하니 붙어 있는 ‘Warning’이나 ‘Fragile’은 그냥 제가 멘탈이 자주 깨지는 편이라서 나름 경고의 의미로 붙였던 걸로 기억해요.

fragile handle with care 샘플

DIY로 하나 만들어 보자

Q. 혹시 붙이고 싶었는데 못 붙인 스티커(못 구해서/붙이기 좀 그래서/..)가 있나요? 더 붙일 거라면 어떤 거?
A. 동료들을 통해 스티커를 한꺼번에 엄청 받은 적이 있단 말이에요. 근데 그 중에도 분명히 저는 잘 모르지만, 멋진 의미가 담긴 스티커가 있었을 거예요. 그때 하나하나 설명을 다 들으면서 보긴 했는데, 하여튼 그때는 제가 그 나머지 스티커들의 의미에 마음이 완전 동하지는 않았어서 안 붙였었죠.

지금도 딱히 붙이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지만, 전 그냥 스티커라는 게 다양하게 많이 붙이면 붙일수록 좋은 거라 생각하다 보니 그 스티커들의 의미를 알지 못해 붙이지 못했던 게 그땐 못내 아쉽긴 했던 거 같아요. 하지만 그 이후로 여기저기서 구해서 더 멋진 걸로 붙였으니 괜찮아요. 그리고 이제는 사실상 완성(?) 상태나 마찬가지라서 더 붙이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드네요. 더 붙이면 아예 가려지는 스티커도 생길 테고요. (웃음)

 

CASE 2: 박신영

박신영의 노트북.

박신영의 노트북.

Q. 자기소개해줘.
A. 안녕하세요. 지식융합학부 복전으로 융합인재가 되려다 망테크 인생을 타서 망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융합인재란 건 망테크란 뜻이에요… 생각해 봤는데, 융합이라는 건 개인이 개인의 삶에서 이룰 수 있는 게 아니야. 자기가 융합을 하는 게 아니라, 집단 내에서 다른 사람끼리 하는 게 융합이지…

Q. 하나하나 소개해줘.
A. 오른쪽 아래 초록색 스티커는 ‘디투’라고 NHN에서 하는 개발자 컨퍼런스 같은 곳에서 준 스티커야. NEXT에 있어서 주워다 붙였어. 그러고 보니 이걸 왜 붙였지? 균형을 위해서? 붙일 땐 예뻐 보였는데…

Q. 그 옆에 나란히 붙은 스티커들은?
A. CONSTELLATION이랑 생각버스 스티커는 소소시장이라고 세종문화회관 뒤에서 하는 세종예술시장에서 구한 거야. 생각버스는 독립잡지인데, 버스 노선에 따라 여행가이드북 같은 걸 하고 있거든. 7016 가이드북 같은 식으로. 직접 타고다니면서 정류장마다 어떻게 놀면 되고, 뭐가 있고 하는 걸 노선별로 만드는 거야. 273도 있을 걸? 소소시장에 갔더니 이 사람들, 둘이 만드는 건데, 지금 서점, 큰 서점에도 가면 이게 있다? 난 이게 두 명이서 하는 거라고 생각을 못 했어. 생각보다 퀄리티 있게 나오거든.

그 옆에 필밍아웃은… 나 맨날 까먹어. 내가 아는 영화 컨텐츠 크리에이티브 그룹이 있거든. 여기가 원래는 독립 영화 자체 GV나 상영회를 개최하던 팀이 다른 것도 좀 해 보자 해서 잡지를 만들었는데, 그 와중에 내가 섭외가 됐고. 잡지 주제가, 마니아층이 있는, 아니면 다시 많이들 이야기되는 영화들 중에 우리가 이야기하고 싶은 걸로 정해진단 말야. 1호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2호는 이터널 선샤인. 그거 하면서 갖게 된 스티커.

Q. 그 옆엔 뭐야? 모노태스크?
A. NEXT 하던 시절, 옆자리 언니가 어떤 플래너의 장단점을 말해줄 테니 사야 될지 어떨지 결정해 보래. 그런 식으로 영업을 당해서 나도 샀더니, 제품이랑 손편지랑 같이 스티커가 온 거야. 이것도 디자인 전공 두 명이서 졸업과제 하다가, 정말 하고 싶은 일 하고 싶다고 하면서 시작했다고 하더라. 그 플래너는 뭐 그냥 자잘하게 좋은 포인트들이 많아. 내가 플래너를 잘 못 쓰는 사람이었을 뿐이지… 투두리스트니, 메모 공간이니, 뭘 먹었는지 적는 공란이니, 플래너 써본 사람들이 직접 개선하고 만들고 싶어서 만든 느낌이 나.

박신영의 노트북 안쪽

그리고 얘네들은 일러스트레이션 페어에서, 그냥 예뻐서 샀어요.

Q. (전면에 붙은 가오나시 스티커를 보며) 그러고 보니 사과를 가렸네? 애플 쓰는 사람들은 이거 잘 안 가리지 않나?
A. 애플 많이들 가리지 않나? 넥스트 사람들은 엄청 많이 붙이거든. 우리끼리 생각에는, 입학해서 100개를 동시에 받으니까, 다들 이거 쓰고 있으니 뭔가 나만의 것을 해야겠다는 느낌이 있어서인 것 같아. 넥스트 사람들은 애플 가린 사람이 절반? 개발자 문화가 좀, 그런 게 있는 것 같아. 구글 스티커, 트위터 스티커 등, 개발자 컨퍼런스 가면 이런 걸 준다? 그럼 이제 여기 붙이는 거야. 사실 이거 내가 직접 만든 거야. 넥스트에 스티커 프린터를 가지고 있는 오빠가 있어서, 도안 만들어가면 뽑아줬거든. 물음표도 사과 이파리 맞춰서 열면 불 들어오게 붙인 거야.

곰신 군화 이름스티커

내 꺼 임 ⓒhanana-shop

Q. 여기 붙인 스티커들에 혹시 너만의 주제가 있니?
A. 관통하는 의미는… 딱히 없네. 나도 원래 맥 안 쓸 땐 안 붙였거든. 관통하는 거라기보다, 스티커를 붙이니 내 거라는 느낌이 강하더라. “이 맥이 다른 맥과 차별화되어야 한다!” 같은 느낌이 아니고, 이게 내 맥이라는 느낌? 맥 자체의 특징이기도 한데, 맥은 쓸수록 내 컴퓨터 같은 느낌이 있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느낄지는 잘 모르겠네. 딱 켰을 때, 내 개인 컴퓨터란 느낌이 있어. 단축키 프로그램을 깔아서 나만의 단축기를 지정해둬서 더 그럴지도 모르겠네. 옵션+k를 누르면 카톡이 나온다거나. 다른 컴퓨터면 인터넷 켜야지~ 해서 단축키 누르는데 아무 것도 안 나오고.

Q. 더 붙이고 싶은 건?
A. 내가 만들어서 붙일까 싶어. 이것들은 그냥 예뻐서 붙인 거고, 필밍아웃은 내가 하고 있는 거라 붙인 건데… 내가 내 스티커를 만들어서 붙여볼까 싶어.

 

CASE 3: 이해찬

이해찬 노트북

이해찬의 노트북.

Q. 너는 어떤 사람이야?
A. 스물 한 살 이해찬입니다. 트탐라 에디터고요. 어… 스티커를 보면, 한 쪽에는 일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고, 다른 한 쪽에는 여행가고 싶다는 내용이 있는 걸로 봐서 모순적인 사람인 것 같고(웃음).

Q. 이 스티커들은 어떤 것이고, 어디서 구한 거야?
A. 일단 여기 일 관련된 스티커를 먼저 샀어. 어디서 샀는지는 모르겠네. 그 다음엔 DDP에 갔다가, 예쁜 걸 보면 못 참아서 여행 관련 스티커를 사서 붙였고.

Q. 이 스티커들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어?
A. 한창 일이 안 풀려서 이거라도 붙이면 일을 많이 하겠지, 하고 이걸 붙이고 찍어서 인스타그램에 올렸어. 이걸 붙인 날 밤에 일이 손에 안 잡혀서 놀기만 했거든. 그러다가, 뭔가를 붙이고 싶었어. 남들이 붙이는 게 멋있어서. 이후 DDP에 간 적이 있었는데, 예쁜 걸 보면 못 참아서 샀어. 샵이 모인 곳이 있어서 거기서 샀는데 굳이 이걸 산 건,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서였어.

지금 다시 이 스티커들을 보면서 생각해 보니까, 뭘 계속 열심히 해야 했을 때 ‘공부를 해야지, 일을 해야지’라고만 생각하는 대신, ‘빨리 잘 끝내고 미래의 여행을 생각하자’라고 맘먹었던 게 나한테는 더 생산적이었다는 생각이 드네.

Q. 공간이 아직 남았는데, 붙이고 싶었는데 못 붙인 거 있어?
A. 오히려 붙이고 싶은 걸 계속 붙이다 보면 두서없이 도배될 것 같아서… 내가 뭘 생각하고 싶었나 잊어버릴 것 같고. 붙일 게 있다면 그냥 좋아하는 연예인이나 예쁜 사진 같은 거 붙이고 싶어. 풍경 사진 같은 거?

반도의 흔한 관물대 사진

이해찬피처님… 그냥 연예인 사진 붙이고 싶다고 하셔도 되시지 말입니다…

Q. 그런데 남들하고는 스티커 붙인 방향이 반대 방향이네?
A.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내가 잘 보이게’ 붙인 것 같아. 남에게 보여주기보다는, 내 마음에 드는 게 중요했던 것 같아. 내가 보고, 내가 생각을 하려고. 그래서 내가 보이는 쪽으로 붙였던 것 같아. 뚜껑이 닫혔을 때를 생각하고, 닫혔을 때 내가 보려고 붙이다 보니까 이렇게 된 거지.

Q. 남들은 뚜껑이 열리면 나를 보는 사람이 볼 수 있게끔 붙이잖아?
A. 난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붙이는 줄 알았는데?

 

CASE 4: “그녹”

그녹의 노트북

그녹의 노트북.

Q. 자기소개를 좀 해 주시죠. 누구시죠?
A. 저는 사학과 수료생이고, 로스쿨 입시 준비를 하고 있어서 매일 학교에 나와요. 전공 테크가 왜 이렇게 되었느냐 하면… 그 예전 대입 때 점수에 맞춰서 안정 지원한 결과…

Q. 이 스티커들은 뭔가영? 하나하나 얘기하자면?
A. ‘나는 페미니스트다’는 그냥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인데, 주변에 한국여성학회 여름캠프에 참여했던 친구들이 많아서 그들 중 한 명에게 받은 거거든요. 그런데 또 무지개 바탕이 맘에 들기도 해서 붙이게 되었어요. 여성주의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퀴어 이슈도 여성주의적으로 접근하는 게 맞는 방향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젠더이분법을 뛰어넘는 사고는 여성주의와 퀴어의 연결점을 보여주거든요. ‘다양한 성이 있다’라는 건데, 그걸 이 무지개가 상징하는 거니까, 좋아해요.

‘아이 엠 히어’는 과제차 이대 성소수자 문화제에 작년 11월에 다녀왔는데, 거기의 ‘변태소녀하늘을날다’가 주셔서요. 사실 다른 스티커들은 직접적으로 성소수자라는 걸 명시하고 있었는데 이건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한 스티커이기도 하고. 다 비슷한 맥락이에요. ‘we are all strangers’는 제가 일하던 단체의 캐치프레이즈인데, 이 단체가 난민의 법적 권리를 옹호하는 단체라서, 소송을 주로 하지만 난민 이슈를 대중에게 알리는 작업들도 많이 하는데, 그 중 하나가 이런 문구를 중심으로 한 문화상품 판매였고, 스티커도 그 중 하나였어요. 우리는 모두 소수자고 이방인이라는 것이 여성주의가 말하는 소수자성과 맞닿아 있어서 맘에 들어서 붙였어요.

마지막으로 이 아무것도 없는 말풍선은 민우회에서 받은 건데, 별 거창한 의미는 아니지만… 아무 것도 없는 말풍선인데, 아무거나 들어갈 수 있는 의미이기도 하잖아요? 정해진 문구가 딱 들어 있으면 부담스럽기도 하고 질릴 것 같아서 그냥 상징적인 걸로 붙였어요. ‘나는 페미니스트다’는 최근에 이런 캠페인이 트위터에서 많이 유행하기도 했었잖아요? 그 나름대로 직접적인 힘이 있는 것 같아서 붙였습니다.

스티커 제작 비용

이쯤 되면 뭐 하나 만들어 보고 싶어지실 것 같아 준비했습니다. 2013년 기준 시세라는군요

Q. 이것들을 관통하는 의미가 있나요? 혹시 더 붙이고 싶은 게 있다면?
A. (그 질문만 기다렸다는 듯) 이 스티커들로 말씀드리자면, 저의 페미니스트적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한 스티커입니다.

Q. 혹시 더 붙이고 싶은 게 있다면?
A. 앞으로 또 붙인다면 무지개, 페미니스트랑 관련된 걸 더 붙이고 싶어요. 사실 페미니스트로서 날 드러낸다는 게 대학 사회에서도 부담이고, 그 밖으로 나가면 더 부담스럽단 말이에요. 페미니스트라는 것 자체가 남들이 편견을 많이 갖는 말이고, ‘드세 보인다’ 같은 이미지가 있잖아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여성우월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리고 싶은데…

말로 설명하는 건 너무 귀찮고 기회도 많지 않으니, 노트북 맨날 들고 다니는 것에 붙여 놓으면 자연스럽게 페미니스트에 대한 거리 같은 것도 좁혀질 수 있지 않을까? 자연스럽게 멀어질 사람들도 있겠지만, 뭐 그런 사람들은 곁에 없어도 되는 사람들이고(웃음). 그래서 페미니스트 관련 스티커를 더 붙이고 싶고, 기왕이면 크고 아름다운 무지개로 이 세상을 덮어버리고 싶어요.

 

CASE 5: 김은하

김은하 노트북

김은하의 노트북.

Q. 자기소개 먼저 부탁드려도 될까요?
A. 저는 알바노조의 조합원이고, 청년좌파의 회원이며, 사회 운동을 하고 있는 스물한 살, 김은하입니다. 사회 운동 중에서는 노동 쪽에도 관심 있고, 요즘은 정당 쪽에도 흥미 있고요. 굳이 말하자면… 노동당? (웃음)

Q. 스티커 하나씩 어디서 받은 건지, 왜 붙인 건지 들을 수 있을까요?
A. 일단 표면은 시트지로 싼 거에요, 다이소에서 그냥 파는 벽지거든요? 이 노트북이 삼성 건데, 대학교 딱 들어와서 ‘또 하나의 약속’이라는 영화를 봤는데, ‘내가 삼성 걸 쓰고 있었어!’ 하는 자괴감이 들고… 마침 주변 사람들이 삼성 것을 안 써요. 괜히 저 혼자 ‘삼성 것을 쓰면 배신자처럼 보이는 거 아니야?’ 해서 아예 처음에 싹 덮었고요. 이렇게 깔끔하게 다니려고 했는데, 그 다음에 처음으로 붙인 스티커는 최저임금 만원 스티커였거든요. 이걸 아는 선배한테 받아서 딱 붙였는데, 그 다음에 알바노조 최저임금 스티커, 2014년 기준으로 5210원인가요? 맞다, 5210원. 그걸 딱 붙였고.

Q. 숫자가 겹쳐져 있는데요?
A. 위에 2015년 5580원 버전 스티커가 나와서 그걸 덮어씌운 거예요. 알바연대 다음에는 그 왼쪽 옆에 있는 ‘해’피콜 스티커를 붙였어요. LG 유플러스랑 SK 브로드밴드가 한창 투쟁할 때 알바노조 소식지에 이 스티커가 들어 있었거든요. 그 다음에 ‘금요일에 돌아오렴’ 붙였고, 노후원전 폐쇄 스티커는 생태운동 하는 친구가 줘서 붙인 거고… 그 다음에 “참! 망했어요”는 올해 붙인 것. ‘망하지 않은 사람들’ 프로젝트라고 여러 단위가 함께한 기획의 일환인데요, 청년실업과 청년부채 등 많은 청년문제가 있잖아요? 그걸 ‘우린 전부 다 망했다’라고 드러내고,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거죠. 어떻게 해서 망했니, 왜 망했니… 이런 대화를 통해 공통적인 경험을 하고 이 문제를 같이 공유해 보자는 취지로 하는 프로젝트였습니다.

Q. 그럼 이것들이 주는 의미, 이 스티커들이 관통하는 의미를 여쭤봐도 될까요? 다른 스티커도 많은데 이것들을 붙인 의미, 나를 어떻게 보여주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부탁드릴게요.
A. 대한문 옆에 있는 던킨도너츠에서 노트북을 열어 놓고 일을 하고 있으면 다들 지나가면서 제 노트북을 힐끔힐끔 쳐다봐요. 통유리 앞에서 일하고 있으니까. (좋긴 좋은데) 한편으로는 민망하기도 하고, 왜 쳐다보는 건지 부담스럽기도 하고… 지금은 대학교 2학년인데, 1학년 때 신문방송학과 전필 수업 맨 앞에 앉았더니 교수님이 그래요, 이 만원 스티커 뭐냐고, 알바 하냐고… (웃음) 그런 적도 있었고요.

관통하는 거라면, 이런 것에 대해 알리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거죠. 지나가면서. 이게 다 ‘싸우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거잖아요? 같이 그 사람들과 함께하고, 나도 함께 싸우겠다는 의미가 있다는 거죠.

김연아 은퇴 세월호 리본

ⓒ중앙일보

Q. 원래는 더 붙이고 싶은 스티커를 여쭤보려고 했는데, 싸우는 사람들이 더 늘진 않았으면 한다고 하시니니 다르게 여쭤보겠습니다. 뭘 먼저 떼고 싶으신가요?
A. 해결된 게 없네… ㅠㅠ 고리원전도 아직 폐쇄까지는 좀 걸리니까요. 음… 그나마 최저임금 만원이 가장 가깝지 않을까요? 최저임금 만원이, 알바연대만 했던 구호인데, 점차 시간이 지나며 민주노총도 말했고, 전 사회적으로 커지는 느낌이어서, 최저임금 만원이 빨리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저도 알바를 하고 있기 때문에 절실하고요.

Q. 안 붙이거나 못 붙인 건?
A. 글쎄요. 까먹었어요!

 

어떤 액세서리는 백 마디 말을 대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 노트북의 깨끗함에 새삼스럽게 놀란 그 수업 이후부터, 나는 스티커를 조금씩 붙이기 시작했다. 활동하던 단체에서 예전에 만들어 둔 스티커를 갖다 두어 개 붙이고, 친구가 준 원전 반대 스티커도 각 맞춰 붙여 보고, 환경운동을 하고만 싶었던 마음을 담아 reduce waste라는 귀여운 스티커도 붙여 보았다. 내가 보기 좋은 노트북 안쪽에는 노란 리본 스티커도 하나 붙여 보았다.

그러고 나서 노트북에 스티커를 붙인 다른 사람들을 만나 보니, 작은 스티커 하나에서 백 마디 사연이 풀어져 나오고, 스티커 붙이는 방향에조차 나름의 의미가 부여돼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럴 수밖에. 그게 모두 자기니까. 그 노트북을 쓰는 사람, 노트북 뚜껑을 열고 닫는 사람, 그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를 결정하는 사람, 그게 모두 잡티 없이 그저 한 사람의 삶이고 관점이고 취향인 거니까.

그래서 앞으로도 한동안은, 강의실과 카페에서 사람들의 노트북 뚜껑을 유심히 관찰하게 될 것 같다. 이것처럼 상대방에 대해 많이 알아볼 수 있는 키워드도 드물지 않겠는가.

 

편집자주:허자인 피처의 노트북에 대해서는 생략하겠습니다.
곧 시작될 Twenties' Timeline 피처에디터 및 콘텐츠에디터 모집에 지원해 합류하시면, 피처 본인이 설명을 해 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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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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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enties TimeLine 피처 에디터. 못하는 것 빼고 다 잘하는 그냥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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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 그러다가 혹시라도 이게 뭐냐는 궁금증 가득한 시선을 만나면, 쿨하게 그 스티커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자. 아마도 당신은 상대방에게서 작게나마 동경과 귀여움을 사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