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17년째 살고 있는 경기도 과천은
어느 때부턴가 재건축을 하기 시작했다.
2004년인가 2005년 즈음부터 오래된 주공아파트를 밀고 높은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했으며, 길 건너 상가 주인이 몇십 억을 달라 했다느니 하는 소문이 돌 때쯤 재건축을 위한 안전정밀진단을 통과했다고 기뻐하는 광고판이 내걸렸다. 다른 동네에는 무능한 조합장을 축출하자느니, 재산권을 지켜내자느니 하는 플래카드가 내붙었다. 평화롭게만 보였던 동네에, 누가 한 푼이라도 더 가져가느냐 하는 문제로 피바람이 불고 있었다. 살던 동네가 본격적으로 재건축에 들어가게 되면서 나는 다른 동네로 이사가게 되었다.
얼마 전 친구를 만나러 은평구 대조동으로 간 일이 있었다. 마침 그곳도 재건축 바람이 한창인 것 같았다. 재능교육 학습지 부스와 비슷한 노란 천막 하나를 세워 놓고 재건축 반대 서명을 받고 있었고, 촌스러우면서도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내기엔 딱 좋은 스티커 포스터가 온 동네 담벼락과 전봇대에 붙어 있었다. 공시지가의 몇 퍼센트가 어쩌니 저쩌니, 재건축 이후 오히려 집값이 뚝 떨어졌니 하는 공포스러운 멘트들이 가득했다. 웃긴 건, 그 주택가에서 1분만 걸어나오면 재건축 매매 상담을 크게 써붙인 부동산들이 보였다는 거.
그런데 포이동은 조금 달랐다
돈을 더 받냐, 집값이 떨어지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는1979년, 박정희 정권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당시 넝마주이나 도시 빈민 등을 모아다가 자활근로대라는 이름으로 한데 강제수용을 했는데, 이후 집단수용으로 인한 문제가 끊이질 않자 81년 전두환 정권 들어 몇 개 그룹으로 분산하여 그 중 45명을 강제이주시킨 곳이 지금의 포이동의 시초라 할 수 있다. 국가에 의해 이리저리 치이고 휘둘리게 된 포이동 사람들의 이야기는 여기 즈음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허허벌판이나 마찬가지였던 땅. 수도니 전기니 하는 제대로 된 시설도 하나 없이, 비닐하우스에 방을 만들고 먹고자며 살아가기 시작했다. 열악한 곳이긴 했어도, 당시 관계자들은 자활근로대원들에게 ‘이 땅은 시유지이니 평생 마음 놓고 살아도 된다’라고 했단다.
그 후 1988년 말,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경찰관이 와서는 전부 모이라고 하고는 종이를 나눠주었다'고는 ‘나는 이제 자활근로대를 그만둔다’라는 서명을 강요하였다. 글씨를 쓰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대필까지 해 주고, 지장을 찍으라고 했다. 자활근로대로서 그곳에 살아 왔던 기록을 파기하려는 의도였다.
그리고 어느 날 포이동에 살던 이들에게 ‘고지서’가 날아왔다고 했다. 지도관에게 물으니 처음 한 번만 성의를 보이면 될 일이라고 하여 힘들게 돈을 만들어 냈지만 그 이후로도 계속 '고지서'는 끊이지 않았다. 주민들의 의문에 지도관은 여전히 신경 쓰지 말라는 말만 되풀이 할 뿐이었고, 주민들도 그 말을 믿는다.
믿음의 결과는 처참했다. ‘고지서’의 내용은 불법점유로 인한 토지변상금이었고, 그동안 미납된 금액은 이자까지 포함하여 8천만 원 가까이로 불어났다. 2009년에서야 ‘개포동 1266번지’로 주민등록이 등재되긴 했지만, 여전히 토지변상금 문제는 주민들을 옭아매고 있다. 마음 놓고 살아도 된다던 국가의 말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지자체인 강남구청은 무관심과 대화 거부로만 대응해 오고 있었다.
그리고 2011년, 마을에 큰 화재가 발생했었다.
마을의 절반 이상이 불에 타버렸고, 주민들이 화재 잔재를 치우고 마을을 복구하려고 하면 강남구청 직원들과 용역들이 기습적으로 들어와 강제철거를 진행했다. 포이동 사람들은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법적으로 해결하면 되는 문제가 아니냐는 이야기만 돌아올 뿐이었다.
그 법을 살펴보자. 신희철 포이동주거복구공대위 상황실장은 뉴스참과의 인터뷰에서 “서울시와 강남구청이 시유지에서 살 수밖에 없게 된 주민들을 불법점유자라며 부과한 토지변상금이 총 25억여 원으로, 무슨 일만 하려고 하면 토지변상금을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가압류가 들어오는데 어떻게 임대주택을 계약하고 월세를 정상적으로 낼 수 있겠느냐”며 “임대주택 이주는 거짓 대책에 다름없다”고 대답했다.
* 사실 포이동의 역사는 길고 복잡하며 여러 가지 문제가 복합적으로 맞물려 있기에 이 짧은 기사에 다 담기는 어렵다
.관심이 있다면, 포이동 재건마을 이야기 홈페이지에서 포이동의 역사를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내가 처음 포이동에 가 본 건 올해 4월이었다.
포이동과 가장 열심히 연대해 온 평화캠프에서 활동하는 한 친구를 따라, <웰컴 투 포이동>이라는 이름의 문화제가 있다고 해서 따라갔었다. 신촌에서 지하철을 타고, 을지로3가에서 갈아타서 오금행을 타고 쭉 내려갔다. 평화캠프 활동가 친구가 포이동 관련 자료 하나를 보내줘서 대충 읽다 보니 어느덧 매봉역에 도착해 있었다.
매봉역은 강남구에 있었는데, 높은 상가 건물들, 그리고 더 높고 번쩍거리는 타워팰리스가 보였다. ‘이런 곳에 ‘포이동’이 있다고?’ 하는 생각을 하며, 가지런히 심어져 있는 벚나무 가로수들을 보며 걸음을 옮겼다. 5분 정도 걷다 보니 양재천 다리가 나왔다. 예쁜 가로수들과 말끔하게 정돈된 강가, 산책로. 예쁜 풍경에 정신을 놓고 다리를 건넜더니, 갑자기 강남에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할 모습의 판자촌 하나가 나왔다.
세심하진 않지만 아기자기하게 그려진 벽화들, 플래카드라기보다는 플랑이라고 불러야 할 듯한, 손으로 만든 환영 문구들이 곳곳에 걸려 있었다. 어찌 보면 촌스럽다 느껴질 만하면서도, 다시 보면 정겨울 법한 모양새였다.
벽화나 계고장이 없으면 구분이 가지 않을 만한 판잣집 사이 골목길들을 돌아돌아 들어가니 후라이팬으로 뭔가를 구워내는, 치직거리는 소리가 났다. 포이동 주민들은 문화제에 앞서 함께할 식사를 준비 중이었는데, 우리를 보자마자 호쾌하게 웃으며 반겨주었다. 왔냐, 잘 왔다. 얼른 들어가 식사하시라, 아이고 먼 데서 많이도 왔네. 사람이 사람을 맞아들이는 냄새가 났다.'도와주러 오셔서 감사합니다'도 아닌, '뭐 해줄테니 우리를 위해 싸워 달라'도 아닌, 단순한 환대의 내음이었다.
가서 앉아있는 것 이외에는 딱히 크게 할 게 없었다. 그런데도 주민들은 우리의 방문을 웃는 얼굴로 맞아주었다. 이런 식의 환영은 정말, 정말 오랜만이었다.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어려워하거나 어색해하지도 않았고, 요구할 거리가 있어 안절부절못하거나 눈치를 보지도 않았다. 뭔가 도움을 바라기 위해 부러 잘해주는 게 아니라, 연대하러 온 사람들이 어색하지 않고 편안한 마음을 연대할 곳의 풍경에 녹아들 수 있도록 반겨 주는 것뿐이었다.
주민들도, 우리도 한 푼이라도 더 얻어내기 위해, 더 큰 이익을 위해 뭉친 사람들이 아니었다. 포이동은 하나의 공동체, 함께 살아 온 이야기들을 공유하는 마을 공동체였다. 특별히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해 달라고 바라는 게 아니었다, 그냥 우리를 마을의 손님으로 받아들이고 반겨주었을 뿐.
우리가 오기 전에는 주민들이 약간의 채소라도 가볍게 수확하려고 씨앗을 뿌려둔 마당에 용역들이 와서 씨앗을 짓이기고 가벼렸다고 한다. 다행히 이번 문화제는 방해 없이 무사히 진행되었다.
문화제가 시작되었다
포이동의 간단한 역사에 대해서 듣고, 참여해준 단체들에 대한 소개가 이어졌다.
"어디어디서 오셨습니다, 다음은 어디서도 오셨는데요… "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많은 단체들이, 훨씬 많은 사람들이 포이동과 함께하기 위해 각지에서 와 있었다. 문득 이 사람들이 왜 그 먼 길을 지나 여기까지 왔을까, 그리고 나는 여기 왜 왔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답은 간단했다. 나는 운 좋게 포이동 주민이 아니었을 뿐이다. 우리의 삶이 언제까지나 국가의 계획에 의해 휘둘리지 않고 안전할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일상이 자본의 논리에 의해 파괴되지 않고 안심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물론 ‘눈앞에 닥친 당장의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언젠가 나의, 혹은 나와 관련된 사람의 문제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모인 많은 사람들은 포이동과 연대하기 위해 문화제를 만들고 있었다.
여러 뮤지션들도 문화제에 찾아왔다. 4월의 야마가타 트윅스터는 돈만 아는 즈~질~이라는 가사를 연신 ‘즈질스럽게’ 읊어댔다고 한다. 5월의 노동당 몸치패 사람들은 흥에 겨워서는 일어나서 단편선을 둘러싸고 둥기둥기 춤을 추기도 했다.
공연 내내 그런 분위기였다. 동네 애기들은 온 무대를 헤집고 기어다니거나 걸어다니고 꺄르륵꺄르륵 소리를 질렀지만, 아무도 아이들에게 눈치를 주지 않았다. 그냥 있고 싶은 대로 있을 수 있는, 따뜻하고도 자연스러운 모습들이었다.
문화제와 함께한 뮤지션 '하늘소년'은 땅따먹기라는 노래를 불렀다.
땅따먹기를 한다 아직 땅따먹기를 하나
이제 땅따먹기 끝났다
땅따먹기를 하다 땅이 사람 먹기를 한다
그런 땅따먹기를 하다
네 땅 넓어지면 내 땅 없고
내 땅 넓어지면 네 땅 없네
어차피 끝날 땐 빈손으로 떠날 것을
왜 그리 아쉬워 했었는지
지금은 그때보다 큰 땅 가졌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땅따먹기
뭐가 그리 더 많은 땅이 필요한지
그렇게 욕심부려도 영영 못 가진다
포이동은 그런 곳이었다
땅따먹기가 커지고 커져 사람을 먹어들어가려 하는 곳. 개발논리가, 자본의 논리가 공동체를 파괴하려 하는 곳. 시유지니까 마음 놓고 살라고 할 땐 언제고, 땅값이 오르니 이제 나가라고 하는 곳. 주민들의 삶이나 그들에게 가해진 부당한 일들, 그들 뜻과는 무관하게 지워진 짐에는 어떠한 관심도 없이, 그저 알아서 사라지라고 하는 곳.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삶이, 따뜻함이 계속되는 곳.
포이동 사람들의 주장은 임대주택 입주 보장도 아니었고, 점유에 대한 보상 지급도 아니었다. 다른 재개발 지구들처럼 누가 한 푼 더 받냐, 덜 받냐의 싸움이 아니었다. 그저 구청이나 용역의 위협 없이 안전하게 이 자리에 이대로 살게 해 달라는 것이고, 국가에 의한 강제수용과 일방적인 철거를 인정하라는 것이었다. 그동안 가꿔 온 공동체를 지키고, 왔다갔다하는 ‘국가의 큰 계획’에 의해 더 이상 사람들의 삶이 휩쓸리지 않을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뿐이었다.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 그냥 포이동을 떠나서 지방이든 어디든 떠나면 되는 것 아닌가요?'
'왜 굳이 거기서 버티고 있어야 해요?’
상상해보자, 우리가 이사를 가야 할 때의 모습을. 정들어 함께 살아왔던 사람들과 동네를 떠나야 한다. 어떤 역사가, 어떤 맥락이 있는지 전혀 모르는 낯선 곳으로 가서 정 붙이고 살아야만 한다. 이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어느 곳으로 옮겨가든, 고물 수집으로 삶을 이어 왔던 사람들에게는 비싸고 감당하기 힘든 보증금과 월세를 어떻게든 만들어내야 한다.
부당하게 부과되어 왔지만 국가의 그 누구도 해결하려 하지 않는 몇 천만 원의 토지변상금은 포이동 주민들을 따라다닐 것이다. 국가에 의해 개인들의 삶이 휘둘려 왔던 상처의 역사는 치유되지 못한 채 남을 것이다.
페이스북에는 포이동재건마을지킴이 페이지가 있다. 이 페이지는 포이동 문화제 공지를 하기도 하고, 포이동에 일이 생겼을 때 소식을 공유해주기도 한다. 며칠전만 해도 구청 직원들과 용역들이 와서는 마을을 둘러보니 어쩌니 하면서 주민들에게 겁을 주고 돌아갔다고 한다.
나는 다음 문화제에도 함께할 예정이다.
5월 문화제에서 회기동 단편선이 불렀던 노래, 동행처럼.
그래도 계속, 계속 걸어가요
지금이 좋아요
계속 걸어가요
같이 걸을까요
지금이 좋아요
이 밤이, 이 밤이, 이 밤이 좋아요
같이 걸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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